“인간은 65세 전후면 노망기가 듭니다. 절대 실무를 맡으면 안 됩니다. 60이 넘으면 손 떼야 합니다. 65세가 넘으면 젊은 경영자에게 넘기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건희 회장이 한 말이다. 당시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삼성의 한 임원은 “당시 독일로 불려간 나이 든 임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안희태이재용 부사장은 12월3일 인사에서 삼성전자 사장으로 승진 됐다.
지난 10월 멕시코 출장길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68)은 다시 ‘젊은 조직론’을 들고 나왔다. “조직은 젊어져야 한다. 젊게 해야 한다.” 귀국길에는 “21세기는 젊은 사람이 조직에 더 어울린다”라고 말했다. 재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 특히 삼성 내부는 긴장했다. 12월1일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42)에 대해 “내년에는 (그 역할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새로운 10년이 시작됐으며, 이는 예전 10년과는 다르다. 21세기의 10년은 굉장히 빠르다.” (12월1일은 이 회장이 삼성 회장으로 취임한 지 23년째 되는 날이었다. 1987년 12월1일 이건희씨는 삼성 회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지 20일이 지난 무렵이었다.)

이 회장 발언이 있기 직전 이재용 부사장은 이례적으로 〈매일경제〉와 인터뷰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이 강조한) ‘젊은 조직’을 나의 ‘부각’으로 해석하는데 말도 안 된다. 회장님이 (삼성의) 중심에 계신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부사장을 12월3일 인사에서 삼성전자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로써 이재용 사장이 경영 전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최고고객총괄책임자(CCO), 최고운영책임자(COO)같이 역할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직책을 맡아왔으나, 내년부터는 ‘이재용 브랜드’로 사업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재용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재용 시대에 맞춘 연말 정기인사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 라인·나이·건강·흡연 여부가 관건이 될 거라는 둥, 체크리스트가 있다는 둥 별별 얘기가 사내에 떠돈다. 삼성 내부는 김용철 사태 때보다 더 긴장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이재용 사장, 보여준 능력·실적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재용 시대로의 진입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2008년 4월22일 이건희 회장은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은 “이재용 전무는 삼성전자의 COO를 사임한 후 주로 여건이 열악한 해외 사업장에서 임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체험하고 시장 개척 업무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열악한 사업장에서 이재용 전무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2009년 2월11일, 이재용 전무의 부인 임세령씨가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이재용 전무가 미국 AT&T 페블비치 내셔널 프로암대회에서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와 동반 라운딩을 취소했다는 뉴스가 뒤를 이었다. 삼성 주변에는 이재용 전무의 외유가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2009년 12월 이재용 전무는 부사장으로 전격 승진한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은 사장으로 등극했다. 그의 사장 승진을 계기로 3세 경영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시사IN 안희태이건희 삼성전자 회장(68)은 “21세기는 젊은 사람이 조직에 더 어울린다”라고 말했다.
1993년 9월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창업) 2세대가 그룹을 이끌려면 첫째, 집안의 굴복은 못 받을지언정 잡음은 없어야 하고 둘째, 회사 임직원한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창업 세대가 키워놓은 세력들이 남아 있으므로 거부 세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셋째,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제 경우에는 집안 정리하고 회사 정리하는 데 5년 정도 걸렸다고 보면 됩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이재용 사장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첫째, 집안의 잡음이 적지 않다. 지분 구조가 취약한 이 사장에게 이혼은 치명타가 분명하다. 지난 8월에는 이병철 전 회장의 손자이자 이건희 회장의 조카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이 투신했다. 재찬씨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소식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도 이재용 사장에게는 부담이다.

3남매의 재산 분할 등 난관 많아

그렇다고 이 사장이 회사 안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 사장이 경영에 나선 것은 2000년대 초 인터넷 사업이 유일하다. 당시 이재용 전무는 인터넷 지주회사인 e삼성을 중심으로 16개 계열사를 거느렸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재용씨가 e삼성 사업으로 8000억~9000억원을 허공에 날렸고, 삼성에서 그 손실을 고스란히 보전해주었다”라고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말했다.

이 사장이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면 더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이 사장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61억원으로 자산 200조원에 이르는 삼성그룹을 인수하면서 세금을 16억원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재용 사장이 재산을 늘리고 그룹 지배권을 장악한 과정에는 편법과 변칙이 동원되었다(오른쪽 표 참조). 법적으로는 마무리되었다고 하지만 국민 여론상 여전히 인정받기 어려운 대목이다.

12월1일 강용석 무소속 의원은 “이건희 회장은 정신 질환으로, 승마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이재용 부사장은 허리 디스크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회장이 신의 아들이라면 이 부사장은 신의 손자다”라고 꼬집었다. 또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의 백혈병 문제, MBC 내부 정보의 삼성 유출 사건, 무노조 경영도 이재용 사장이 사회적으로 넘어야 할 벽이다.

ⓒ삼성그룹 제공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가전제품 전시회에 이건희 삼성 회장(가운데)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이 회장의 왼쪽이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오른쪽이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이다. 맨 오른쪽이 이재용 사장이다.

이 사장은 그동안 이건희 회장의 ‘황제 경영’을 뒷받침한 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개명)의 도움에 의존하리라 보인다. 삼성은 21세기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미래의 신사업을 육성하고, 그룹 경영의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 컨트롤 타워인 전략기획실을 복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년4개월 만이다. 그리고 김순택 삼성전자 부회장을 컨트롤 타워 수장에 앉혔다. 삼성 안팎에서는 이를 ‘이재용 시대를 위한 포석’이라고 해석한다. “비서실(전략기획실 전신)은 공항의 관제탑 구실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지론이다. 컨트롤 타워가 복원되면 삼성은 이 회장-컨트롤 타워-계열사 사장단으로 이어지는 ‘3각 경영’을 부활시키게 된다. 한 삼성 임원은 “그간에도 이학수 고문이 물러나거나 전략기획실이 해체된 게 아니었다. 이름을 바꾸고 조직이 좀 재편됐을 뿐, 하는 일과 막강한 권한은 그대로였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한 핵심 관계자는 “새 컨트롤 타워는 이 사장의 경영권 승계를 확실히 하고 부진씨와 서현 씨의 사업을 조정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김상조 교수(한성대)는 “최근 삼성이 이부진씨 경영 신화를 급조하려는 게 보인다. 재용씨와 부진씨, 서현씨 간에 후계 경쟁과 재산 분할이 원만하게 진행되느냐가 앞으로 삼성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포인트다. ‘이건희 사람 이학수’에서 ‘이재용 사람 최지성’으로 넘어가는 가신들 간의 권력 이동도 눈여겨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대학교수는 “삼성이 이재용 신화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3대 경영의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 이재용씨가 삼성 총수에 등극하려면 아직 국민들에게 따야 할 학점이 많이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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