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해 1월 출범한 뒤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일관되게 유지해온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이 북한의 농축 우라늄 시설 공개로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전략적 인내란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 대한 진정한 실천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미국이 과거처럼 북한과 핵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따라서 아무리 시일이 걸리더라도 북한이 먼저 비핵화 의지를 보여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겠다는 소극적 정책이다. 그러나 초현대식 우라늄 농축 시설이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의 입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략적 인내 정책이 과연 최선의 대북 핵정책인지를 놓고 미국 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북한이 우라늄 핵시설 공개에 이어 연평도까지 포사격을 가하자, 오바마 행정부는 이 같은 일련의 행동이 사실상 북한과 대화의 문을 닫아온 전략적 인내 정책을 시험하는 것이자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압박 전술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이 지역에 대한 중대하고도 지속적인 위협으로 반드시 대처할 필요가 있다”라며, 핵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오히려 강경한 대북 방침을 천명했다.
 

ⓒReuter=Newsis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백악관에서 북한의 연평도 공격과 관련해 외교안보팀 긴급회의를 열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행태에 상당한 당혹감을 내비치면서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북한은 2002년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농축 우라늄 핵계획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 이를 정면으로 부인한 바 있다. 그 때문에 농축 우라늄 핵개발 문제는 전임 부시 행정부 시절 북·미 핵협상 과정 내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협상 타결을 위해 먼저 플루토늄 핵계획부터 해결한다는 기조를 정함에 따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뒤 북한은 처음으로 농축 우라늄 핵계획의 존재를 시인해 충격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는 철저히 가려져왔는데, 이번에 급기야 실상이 밝혀진 것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하나

현재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이 이례적으로 우라늄 농축 핵시설을 공개한 동기가 무엇인지 분석 중이다. 그러나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고위 행정부 관리들의 말을 종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중 하나는 북한이 오바마 행정부를 핵협상에 끌어내려는 속셈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농축 우라늄 핵계획을 발판으로 궁극적으로는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다. 나아가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의 후계 발판을 공고히 하려는 차원에서, 북한을 명실상부한 핵국가로 만들려고 일을 벌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농축 우라늄 핵계획에 따라 핵폭탄을 만든다면 현재 8~10개로 추정되는 핵 보유고가 앞으로 더 커질 수도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바로 그 같은 점을 걱정한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이 이번에 공개한 1000개 원심분리기 시설의 경우, 외부 세계의 적극 지원 없이는 구축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란과의 연계 가능성도 면밀히 추적 중이다. 이란의 나탄즈 핵시설에 있는 원심분리기 디자인이 북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바마 행정부는 과거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영변 핵시설을 동결한 선례를 감안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병용한 정책을 펼치면 충분히 핵 타결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권 출범 뒤 나름의 북한 포용책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북한이 지난해 5월 2차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까지 단행하면서 오바마 행정부의 분위기도 급변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전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핵협상 결과를 무시하며 처음에는 강공책을 펴다가 임기 후반에 부랴부랴 다시 북한과 협상에 나서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 데서 하나의 교훈을 체득했다. 즉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뒤늦게 핵협상에 응하고 북한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식의 협상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끝에 나온 대북 핵정책이 바로 전략적 인내 정책이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 같았으면 북한의 농축 우라늄 핵계획 공개를 중대한 핵위기 상황이라고 간주해 긴급 협상단을 파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정반대였다. 한국·일본·중국 등 6자회담 참가국과 의견을 조율하려고 해당국에 급파된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이번 사태를 “우려할 만한 일이지만 위기는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북한의 나쁜 행동을 보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조의 배경에는 물론 오바마 행정부가 유지해온 전략적 인내 정책이 깔려 있다. 한반도 전문가인 고든 플레이크의 지적대로 전략적 인내가 ‘견실한 정책(solid  policy)’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인내하지 않고 이번처럼 먼저 행동에 나서면 외교적 옵션이 제한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마음 같아서는 문제의 진원지인 영변 핵시설을 공격하고 싶지만, 이 같은 군사 방안은 사실상 배제된 상황이다. 고작 할 수 있는 게 이번처럼 보즈워스 대북 특사를 관련국에 급파하거나, 백악관이 성명을 내고 한국과 일본 등 우방국과 긴밀한 공조를 강화하는 일이다. 게다가 전략적 인내 정책에 손발이 묶여 있다보니,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과 직접 협상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문제는 북한이 플루토늄 핵폭탄 실험에 이어 농축 우라늄 핵계획을 공개하고, 한국 영토마저 공격하는 마당에 언제까지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고수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더구나 북한이 농축 우라늄 핵시설을 만천하에 의도적으로 공개함으로써 미국이 그토록 갈망하던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까지 저버린 상황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 정책에 따라 대북 핵협상에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북한은 마음 놓고 농축 우라늄 핵계획을 실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콧 스나이더 한·미정책센터 소장은 북한이 우라늄 농축 핵시설 공개를 통해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시험하고 있다며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과 협상을 미룰 경우 북한으로 하여금 더욱 핵 무기고를 확대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다. 지금이라도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미 카터, 북·미 간 직접 협상 촉구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11월24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북한은 미국과 직접 협상하는 동안 핵계획을 종식하기 위한 협정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보냈다”라면서, 북·미 간 직접 협상을 촉구했다. 헤커 박사와 동행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직접 목격한 로버트 칼린 전 국무부 관리도 11월22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미국은 전략적 인내와 유엔의 대북 제재를 통해 김정일 정권이 즉각적인 비핵화 요구에 굴복할 것으로 희망했지만, 회의론자들은 미국의 이 같은 접근이 성공하려면 중국에 대북 압박 의지가 있느냐 여부가 중요하다고 경고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북한과 관계를 강화했고, 근래 양국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훌륭하다”라고 말했다. 전략적 인내 대신에 좀 더 현실적인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견해도 있다.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아시아 선임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 박사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이번 일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가 성급히 북한과 협상에 나서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북한을 봉쇄하고 압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기존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유엔의 대북 경제제재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대북 군사제재가 불가능하며,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인 중국의 협조마저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나머지 2년 재임 중 전략적 인내 정책의 명분과 실리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