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식인들은 미국 드라마가 프랑스인에게 미국식 인간관계와 소비 지향 생활양식을 주입한다고 비판한다. 위는 텔레비전을 보는 프랑스의 한 가정.
몇년 전부터 한국에서 ‘미드’(미국 드라마의 준말)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한국의 ‘미드’ 바람은 주로 젊은 마니아층에 영향을 줄 뿐 전체 시청률은 여전히 국산 드라마가 상위권을 차지한다. 프랑스는 상황이 한국과 다르다. 프랑스 드라마는 점점 미국 드라마에 밀려 퇴출되고 있으며, 프랑스 국내 드라마 제작 여건은 악화되고 있다.

프랑스에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2〉가 처음 방영된 때는 2007년 9월13일이었다. 2007년 여름에는 〈로스트 시즌3〉와 〈히어로즈〉가 방영을 시작했다. 르몽드 같은 주요 일간지는 이들 드라마의 내용과 주요 시청 포인트를 한 면을 할애해 알렸다. 2007년 여름 민영방송인 TF1에서는 한 주에 미국 시리즈물 20여 개를 방영했다.

알로시네라는 프랑스의 대표적 영화 TV 인터넷 사이트는 2007년 연말을 맞아 프랑스 네티즌을 대상으로 ‘올해 가장 재미있었던 드라마’를 투표로 뽑았다. 그 결과 10위권 내에 미국 드라마가 아홉 편이나 선정됐다. 프랑스 드라마는 20위권 안에 고작 한 편밖에 들지 못했다.

미국 드라마는 현재 공중파 채널의 황금 시간대를 장악해 압승을 거둔 상황이다. 주요 채널의 8시 뉴스가 끝난 후인 오후 8시50분부터 드라마가 시작돼 미국 드라마가 프랑스 드라마를 대체하는 셈이다.
프랑스에서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 목록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프리즌 브레이크〉 〈NCIS〉 〈콜드 케이스〉 〈CSI〉  〈4400〉 〈히어로즈〉 등이다. 대다수 공중파가 매일 저녁 서너 시간을 미국 드라마로 채운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미국 드라마 열풍을 사회학 차원에서 논의한다. 예를 들어 〈프렌즈〉나 〈섹스 앤드 더 시티〉 같은 드라마가 미국식 인간관계와 소비 지향 생활 양식을 주입한다는 비판이다. 파리 7대학의 이블린 코헨 교수는 미국 드라마의 영향에 대해 ‘20세기의 텔레비전:세계적인 문화?’라는 제목으로 석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진행 중이다. 2007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세미나에서는 〈24시〉와 〈달라스〉 같은 미국 드라마를 통해 미국 문화의 세계적 팽창과 정치 영향력을 연구한다.

〈프리즌 브레이크〉(위)와 등 미국 드라마가 프랑스 텔레비전의 저녁 황금 시간대를 장악했다.

미국 드라마에 대한 프랑스 시청자의 열광은 프랑스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다. TF1의 픽션 담당 책임자인 타키스 칸딜리는 2007년 7월1일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드라마를 제작한다 해도 시청자의 관심이 적어 방영 횟수에 제한이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프랑스 영상업계의 드라마 제작 능력은 시즌당 18편에 이르지만 현재 6편이나 8편 정도 제작하는 실정이다.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프랑스 드라마 제작진은 미국 드라마를 흉내 내기도 했다. TF1에서 2007년 9월부터 10월까지 총 6편으로 방영한 〈병원〉이라는 드라마는 미국 〈그레이 아나토미〉의 모방작이었다. 시청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찬가지로 〈CSI〉를 베낀 듯한 〈R.I.S〉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본래 프랑스에서 드라마는 ‘작품’(Oeuvre)으로 불렸다. 90분짜리로 제작되고 극의 흐름이 영화와 비슷해 TV영화라 부를 만했다.  1970년대에는 〈비독〉 〈자쿠 르 크로캉〉 등 역사 드라마가 제작되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제 프랑스 드라마는 작품이 아닌 ‘제작물’(Produit)로 불리며 방송사의 상업 전략에 점점 더 종속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2007년 6월29일 TF1이 ‘픽션의 전반적 상황’이라는 주제 아래 드라마 작가·감독·제작자 등 관계자 140여 명을 초청해 프랑스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픽션 제작 현황을 점검했다. 이 자리에서 특히 드라마 작가들은 제작자 및 방송사에서 시청률을 의식해 미국 드라마의 포맷이나 내용 전개를 따라갈 것을 요구한다며 창작의 자유를 역설했다.

민영방송 M6은 공중파 가운데 가장 선정적 이미지를 가진 채널이다. 다른 채널에 비해 미국 드라마를 많이 방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송사 니콜라 드 타베르노스트 사장은 2007년 12월13일 르 피가로와 가진 인터뷰에서 “신참 경찰들의 고군분투를 다룬 〈레블리〉나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의 일상생활을 다소 코믹하게 다룬 〈카멜롯〉 같은 프랑스 드라마도 우리가 방영해 성공했다”라고 강조했다.

프랑스인의 삶 재현한 ‘토종 드라마’ 인기

‘미국 드라마 따라가기’가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프랑스 고유의 재미를 추구하는 몇몇 드라마가 성공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미국 드라마와 같은 번뜩이는 상상력이나 화려한 특수 효과는 없지만, 프랑스인의 삶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 것이다.

프랑스 드라마 가운데 가장 인기가 좋은 프랑스3 채널의 〈아름다운 인생〉은 2004년 8월30일 첫 방송된 이후 현재 시즌 4까지 방영되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드라마는 마르세유의 한 동네 주민들의 생활사를 다룬 일일 드라마이다. 〈태양 아래서〉라는 드라마 역시 1996년부터 방영되어 12시즌에 이른 장수 드라마로, 요즘 프랑스 젊은이의 삶을 담고 있다. 
  
공영방송 프랑스2의 편성 책임자인 에릭 스테믈랑은 미국 드라마의 인기에 대해 여러 차례 우려를 나타냈지만 프랑스 영상물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 2007년 10월22일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2000년에 네덜란드의 〈빅 브라더〉를 시작으로 여러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다 자취를 감춘 것처럼 미국 드라마의 인기도 일시적 현상이라고 단언했다.

프랑스 대중도 화려한 미국 드라마에 완전히 넋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전세계 미드 열풍 가운데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의외로 독일 드라마이다. 〈리사의 운명〉이라는 이 드라마는 370부작짜리 일일 드라마인데, 최근 종반부로 향하며 최고 32%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미국 드라마 〈어글리 베티〉를 독일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이지만, 다른 미국 드라마처럼 자극적인 소재나 기발한 상상력을 담고 있지는 않다. 능력 있고 착하지만 치아 교정기를 착용하고 큰 안경을 쓴, 아름답지 않은 외모의 한 직장 여성이 당당히 세상과 맞서 일과 사랑에서 성공하는 모습에 프랑스 시청자는 많은 사랑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일상의 삶을 잘 묘사하는 것이 미국 드라마를 이기는 방법이다.

기자명 파리·표광민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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