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04년 3월, 금속노련 소속 노동자들이 국내 공장의 해외 이전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차기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CEO 출신 야당 후보가 각종 여론 조사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나, 다른 경쟁자들이 경제 문제 해결 능력을 자부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방증한다.

각 당의 대선 주자들이 서로 질세라 경제 살리기, 일자리 창출 해법을 내놓으며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은 마치 경매장을 연상케 한다. 야당 대선 후보자는 ‘747구상’(7% 경제성장, 10년 내 4만 달러 국민소득, 세계 7대 경제 강국)이라는 야심찬 공약을 내세우며 대형 국토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일자리를 수십 만 개 창출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범여권 예비 주자들은 매년 6% 경제성장과 1년에 50만 개, 5년간 2백50만 개 신규 일자리 창출로 의견을 모으는 듯하다. 심지어 1년에 1백만 개씩 5년간 일자리를 5백만 개 만들겠다고 선언한 후보도 있다.

선거철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던져놓은 목표 수치로 차별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데, 모든 후보자가 ‘성장’이 ‘고용’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데 예외 없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결국 일자리 문제 해결은 성장 정책으로 귀결되고, 적극적인 고용 정책은 불필요한 것으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상태다.

 

더 많은 성장이 고용 가져올까

더 큰 성장이 자연스레 더 많은 고용을 가져온다는 대선 주자들의 주장은 민생의 어려움이 경제성장률 수치보다는 ‘고용 없는 성장’ 때문이라는 대다수 학자의 지적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경제성장 속에서도 일자리가 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으로, 경제학자들은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따른 생산 자동화, 정보 기술 등 첨단산업 비중의 확대, 노동집약적 전통 산업의 해외 이전 따위가 그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고용 없는 성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제조업 부문의 고용 감소 현상과 함께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15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광업·제조업 통계 조사’는 당면한 고용 없는 성장의 위기적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체 유형 자산이 10억원 늘어났을 때 고용 증가 인원이 2003년 평균 36.7명, 2004년에는 18.2명, 2005년에는 3.1명으로 급감했다. 업종과 기업 규모를 고려할 때는 첨단·자본 집약적 업종일수록, 기업 규모가 클수록 투자 증대에 따른 고용 창출의 효과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업 일자리 감소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싼 인건비를 찾아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기업들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제조업의 중국 진출은 국내 고용 감소뿐만 아니라 신규 고용 창출을 가로막아 청년 실업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렇다면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상황은 어떨까. 의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해마다 10%를 웃도는 초고속 성장을 지속하면서 전세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중국의 경우도 고용 없는 성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유 기업 개혁과 생산구조 고도화 전략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제조업 취업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그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 사회로 이행 중인 개발도상국 중국조차 제조업 부문에서 이미 일자리 창출 효과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1999년 중국 정부는 4%의 공식 실업률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방편 중 하나로 ‘대학 입학 정원 늘리기’ 정책을 도입했다. 그 결과 올해 초 대학 졸업생 수는 7년 전과 비교해 다섯 배가 증가한 약 5백만 명에 이르는데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세 명 중 한 명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초고속 성장, 세계 제1위의 직접투자 유입국, GDP 대비 50%에 이르는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높은 수준의 투자율에도 불구하고 고용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시사IN 안희태한국 사회에서 '고용없는 성장'은 제조업 부문의 고용 감소로 심화되기 시작했다.

노동 양극화 초래한 영·미형 대안

 

‘제조업 위기’와 직결된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유일한 해법으로 서비스 산업 육성을 이야기한다. 세계화의 선두 주자이자 이미 1980년대 서비스 산업중심으로 산업 구조 재편을 이루었고,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 때문에 성공 사례로 꼽히는 미국과 영국이 한국 사회의 미래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소득과 노동의 극심한 양극화 문제가 숨어 있다. 노동의 양극화는 금융, 회계, 법률, 컨설팅과 같이 고용 효과는 미약한 고부가가치, 고소득 서비스 업종과 대다수를 이루는 이른바 ‘몸으로 때우는’ 서비스업 종사자 사이의 간극 문제를 말한다. 고용 시장의 서비스화는 ‘맥잡’(Mcjob, 임금도 낮고 전망도 없는 일자리)의 확산으로 이어져 소득 양극화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더욱이 최근 미국에서는 지식 기반 고소득 서비스 부문에서도 해외로 아웃소싱이 진행 중이어서 지금까지 고용 없는 성장의 최고 수혜자로 꼽히는 고급 두뇌 인력들의 일자리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전지구적 현상이다. 다만 각국의 성장과 산업구조 특징, 시장개방 정도, 사회 정치적 요인에 따라 드러나는 양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며, 높은 실업률의 유럽형과 노동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영·미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고용 없는 성장이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 처지에서 보면, 임금 인상 압박이 없는 상황에서 생산성과 이윤이 증가하는 반가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경제가 성장을 지속하는 한, 경제적 부는 계속 증대하고 결국 고용 없는 성장이 창출된 부의 분배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고용 없는 성장은 경제가 선진화되면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경제적 현상임과 동시에 분배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고용 없는 성장의 해법에 대해 더딘 경제성장 속도를 지적하면서 우선은 파이의 전체 크기를 더 키우는 데 집중하고, 나중에 어떻게 나눌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고용 없는 성장이 노동과 소득 양극화를 고착화해 성장 자체를 위협하는 자기 모순을 키워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더 높은 성장만이 양극화의 유일한 해법이 될 수 있는지 참으로 의문스럽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 과정을 통해 산출된 부가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된다고 믿는 일부 절대적 시장 신봉자를 제외한다면, 고용 없는 성장의 모순이 파이 크기를 키우는 성장 정책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분배 문제에 대한 분명한 정치적 해결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파이 키우기에만 열중한다면 어떤 묘안일지라도 그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CEO적 마인드로 무장한 경제 대통령이 나온다면 문제 해결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기자명 조혜경(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