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념도 마찬가지다. 이념의 유전자에 해당하는 인간관·세계관·당파성(핵심 지지층)은 같아도 사회·역사적 환경에 따라 큰 변이를 보인다. 이념의 기본 얼개와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각 나라의 사회·역사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면 이념의 변신도, 정치 변동도 이해할 수 없다. ‘제3의 길’ 등 정치이념의 진화와 정치 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념의 기본 얼개와 더불어 이것이 사회·역사적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변해왔는지 살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발전의 관건은 유한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들 간의 경쟁과 협력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규칙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다. 그 핵심은 승자도 패자도 억울해하지 않는 사회적 상벌 체계이다.
본래 합리적 경쟁 규칙, 즉 정의를 지탱하는 기둥은 4개다. 첫째는 정해진 규칙을 경쟁 참여자들이 준수(승복)하는 것이다. 반칙을 배제한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적으로 권력자·강자들이 법 위에 군림하면서 숱한 반칙을 저질러왔다.
셋째는 경쟁 입구(starting line·출발선)에서의 평등이다. 이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책임질 이유가 없는 불우한 조건의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우대(배려)가 필요하다. ‘제3의 길’이 표방하는 적극적 기회보장 정책은 바로 이 출발선의 평등 정책이 핵심이다. 이 정신은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회 재분배’를 중시하며,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 노동자들 내부의 지식(숙련) 격차를 줄이고, 고용 가능성을 높여 일을 통한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넷째는 경쟁 출구(finish line·결과)에서의 합리적 불평등이다. 이는 흔히 공평성으로 불리는데, 승자·강자의 이익 수준과 패자·약자에 대한 배려 수준을 결정하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많이 기여한 자는 많이 먹고, 전혀 기여하지 못한 자는 굶어 죽으라는 비정한 자원 배분 원칙이 아니다. 공평성은 사회적 상벌체계의 핵심으로, 경쟁 결과 나타나는 격차의 수준과 최소한의 사회적 수준을 결정하는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기계적 평등이나 승자-패자 간의 너무 작은 격차는 사회적 상벌체계를 무력화해 가치(부)의 총량을 제대로 늘릴 수 없다. 이는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1970년대 영국의 복지병으로 증명되었다. 반면에 최소한의 사회적 수준이 너무 낮고, 승자독식·과식을 보장하는 상벌체계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경쟁과 재기불능 상태에 내몰린 패자의 반발을 초래해 결국 승자까지 패자로 만든다.
유연한 노동시장, 시대의 대세
사회 합의가 가능한 승자-패자 간 격차 및 최소한의 사회적 수준은 나라와 시대와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스웨덴·덴마크의 발전을 담보하는 사회적 상벌체계(지극히 작은 격차)가 다른 나라의 발전을 담보하라는 법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제3의 길’의 문제의식을 집대성한,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의 공동선언문(1999년 6월8일, ‘유럽 사민주의자들을 위해 전진하는 제3의 길’)의 현실 인식은 2010년의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계화와 과학적 진보라는 조건 아래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적 자본에 투자하는 것이고, 개인과 기업들이 미래의 지식기반 경제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평생 동일한 직업을 가진다는 평생직장의 개념은 이제 낡았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시대의 대세이며… 정부 재정을 가지고 공공지출을 확대하는 것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이제 한국 사회에 뿌리박은 진보 이념 문제를 살펴보자. 원래 승자와 패자의 이익 수준을 정하는 기제가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라면, 국가의 조세·재정·복지 정책을 통하여 승자와 패자 간 격차를 적정한 수준으로 조정하면 된다. 이는 한국·영국·스웨덴 등 모든 문명국 정치의 공통 과제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과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시장경제의 역사가 일천하다보니 독과점·불공정 거래·소비자 약탈이 난무하고 유효성을 잃은 지대(rent·불평등한 제도에 따른 부당한 이익)도 너무 많다.
비교적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을 가진 선진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구조를 통해 출발선의 평등만 구현하면 경제·사회적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정도로는 약하다. 한국은 분단(휴전)과 국가 주도 경제사회발전 전략의 성공에 따라 국가가 규제·처벌·촉진권(재정할당권)을 지렛대로 하여 너무 많은 것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또한 높은 인구밀도와 사유지 비율, 수도권 집중, 급격한 도시화, 토지이용 규제 등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너무 많은 부동산 불로소득이 발생한다. 이뿐만 아니라 고학력자, 전문가, 공공부문 조기 육성 전략에 의해서건 이익집단의 농간에 의해서건 곳곳에 시장 원리를 차단하는 장벽이 많아서 엄청난 정치·경제·사회적 ‘지대’가 발생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승자 독식·과식 사회라기보다는 그보다 더 나쁜, 어쩌다 좋은 자리(땅·직장·부모)를 잡은 자가 독식·과식하는 사회이다.
한국은 복지보다 정의와 공평이 우선
요컨대 한국은 시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자원들이 시장 바깥에서, 즉 국가에 의해서 배분되는 나라인 것이다. 소중한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격증 부문 및 공공부문과 부동산 문제가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사회적 강자의 반칙에 의해서, 경쟁 방식과 목적의 불합치에 의해서, 불공평한 기회에 의해서, 사회적 강자의 합법적·제도적 약탈에 의해서 사회적 상벌체계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제3의 길’이 한국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그 현실 인식이 말해주듯, 세계화와 지식정보화라는 문명사적 변화에 대한 적절한 응전 노선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사회 역시 영미 사회처럼 적극적 기회 보장 정책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3의 길’의 한계 역시 뚜렷한 것은 발전국가와 분단국가적 특성을 제대로 천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킬리만자로 산의 생태계처럼 다양한 얼굴을 지닌 한국 특유의 모순과 부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강고한 지대 구조를 혁파하지 않으면, 공평한 기회는 본질적으로 지대 추구를 지향하는 ‘고시족·공시족’만 늘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제3의 길’의 한계는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복지 만능주의적 진보 좌파도 다를 바 없다. 한국은 복지에 앞서서 정의와 공평을, 반칙과 특권의 타파를, 더 강한 민주주의를 앞세워야 한다. 이념이 자라온 환경을 보고 한국에 맞는 진보 이념을 개발해야 한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이념의 오퍼상 노릇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
영국을 들썩인 장하준의 직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더 변혁적이다”
영국을 들썩인 장하준의 직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더 변혁적이다”
이종태 기자
“통렬하고 재미있다.”케인스 전기 3부작으로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새 책 〈23 Things They Don’t Tell Y...
-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함께 하라”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함께 하라”
이종태 기자
영국의 유력 진보 매체 〈가디언〉은 지난 9월29일자 사설 ‘장하준을 칭찬함(In praise of Ha-Joon Chang)’에서 장하준 교수(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신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