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서울 노량진역 주변 '고시촌'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20대들로 넘쳐난다.

서울의 한 4년제 대학 출신의 기자가 1997년 졸업할 당시만 해도 취업은 그리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얼마나 더 좋은 직장에 가느냐’가 문제였지, 웬만한 학점에 웬만한 영어 실력만 갖추면 대기업 면접 시험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고통은 1997년 말 외환 위기 직후 그 다음 세대, 즉 현재의 20대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2월 서강대를 졸업한 99학번 김 아무개씨(27)는 삼성·현대·LG·SK·네이버·다음 등 모두가 선망하는 기업을 포함해 비교적 규모가 큰 중소기업까지 총 60여 군데에 입사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대부분 ‘면접 시험 통보’조차 없었다. 대기업과 공기업 등 이른바 ‘좋은 일자리’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경쟁도 치열해진 탓이다.

지난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30대 대기업과 공기업, 금융회사 등의 일자리 수가 1997년 157만9천명에서 2004년 현재 130만5천명으로 27만4천명이 줄어들었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2000년 이후 6년간 전체 일자리 수는 증가(2백만개)했지만 청년층(15~29세)의 일자리는 오히려 53만개가 감소했다는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도 있었다.

 

60여 군데에 원서를 넣어봤지만

“이젠 취업 사이트만 보면 오바이트가 쏠린다”는 김씨는 현재 심각한 패배감과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이제 ‘뭘 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은 접었어요. 제발 아무 일이나 좀 시켜줬으면 좋겠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요.”

김씨 같은 20대들이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비정규직 등 임금이 낮고 미래가 불투명한 일이라도 시작하거나 아니면 공무원 시험 준비 등 다시 몇 년 더 ‘취업 공부’를 연장하는 것이다. 김씨도 제약회사 계약직, 보험설계사, 학원 강사처럼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일자리에 응시했고 잠깐 동안이지만 실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높이를 대폭 낮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임금 체불과 “좋은 대학까지 나와서…”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안 좋은 일자리’는 학력이 낮을수록 더 가까운 곳에 있다. 이는 전문대 졸업 이하 비정규직이 7백38만명으로 전체 비정규직 8백79만명의 84%에 달한다는 통계(2007년 3월)에서도 확인된다. 각각 4년제 지방대학과 전문대학을 졸업한 강철민씨(29)와 고영준씨(26)는 현재 코스콤(구 한국증권전산)에서 비정규직으로 전산 장비 유지·보수 같은 업무를 하고 있다. 이들이 매월 받아드는 임금은 고작 1백만원에서 1백30만원 사이로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않으며, 계약도 매년 갱신해야 한다. 강씨와 고씨가 졸업 직후 들어간 이전 직장 역시 단기 계약직이거나 “사장이 그만두라면 언제라도 나가야 하는” 영세 업체였다.

처음엔 비정규직이 뭔지도 잘 몰랐던 이들의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이렇게 영원히 ‘비정규직 인생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15년 정도 일한 한 40대 선배의 월급이 2백만원도 안 돼요. 만일 정규직이고 좋은 대우를 받았다면 다른 회사로 옮겨도 그만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요? 회사에선 어차피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애들, 계속 적은 돈 주고 비정규직으로 일 시킬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의 걱정이 단지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은 8년간(1998~2005) 동일한 표본(5천 가구)을 개인 추적 조사해 일자리 이동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 가운데 단 7%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강씨, 고씨와 비슷한 처지의 20대 10명 중에서 1명도 정규직이 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시사IN 윤무영2006년 8월 홍익대에서 열린 ‘취업 페스티벌’에서 20대들이 주최 측이 마련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이유

 

좀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향한 20대들의 필사적인 사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화여대 석사 출신인 김 아무개씨(27)는 최근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난해 졸업을 즈음한 시점부터 얼마 전까지 모두 80여 군데에 원서를 내보고, 단기 계약직을 포함해 몇몇 업체에서 직접 일을 해본 뒤 내린 결단이다.

대학원까지 보내준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대기업 등 주요 기업에선 연락조차 없었고, 전공을 살려 알아본 단체나 연구원 쪽은 ‘무급 인턴직’ 제의뿐이었다. 월 1백20만원 정도를 주는 계약직 교직원이 되고자 학교에서 관련 아르바이트도 해봤지만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 올해 3월, 큰 맘 먹고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경험을 쌓자”라며 직원 3~4명 규모의 한 채용 정보 회사에 입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3개월 수습 기간이 지나면 4대 보험에 가입시켜준다”는 약속이 거짓임이 드러나면서 바로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고용보험 등 아무 보장도 없는 곳에서 일할 수는 없잖아요. 일하다 보면 사람도 많이 만날 테고, 거기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거울 보고 웃는 연습도 하고 노동부에서 주최한 ‘자신감 고양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정말 노력했어요. 하지만 남는 건 상처뿐이었어요.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택한 거예요. 사람 만날 필요 없이 ‘점수’로 정직하게 승부할 수 있잖아요.”

‘공시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만큼 공무원 시험은 갈 곳을 잃은 20대들의 거의 유일한 희망이다.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의 경우 2002년 10만5천2백86명(경쟁률 36.1대 1)에서 2006년 18만6천4백78명(64.6대 1)으로 매년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수원에서 2년째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고 있는 김 아무개씨(26)는 “일반 기업은 대부분 계약직만 뽑는데, 취업해봐야 얼마나 다닐 수 있겠느냐”라며 공시족에 합류한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한다.
 

ⓒ시사IN 한향란코스콤 비정규직 사원 강철민씨(왼쪽)와 고영준씨(오른쪽). 이들은 영원히 ‘비정규직 인생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우먼타임즈〉 기자로 일하고 있는 채혜원씨(27)는 이런 ‘자기 세대’의 모습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하면서 2년, 3년 동안 공무원 시험 준비만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요.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아야 하는 나이인데,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공무원이 되는 것은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오로지 ‘안정’만 찾는 거죠.”

 

돈을 쥐기도, 짱돌을 들기도 어려운 세대

지난 2003년 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올해초까지 대구에서 줄곧 직장 생활을 해온 정 아무개씨(24)는 지금 한 4년제 대학에 편입해 영문학을 공부하는 중이다. 초등 영어 전문 강사가 되면 좀더 높은 보수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두 곳의 직장에서 70만~100만원 사이의 저임금과 하염없이 늘어나는 업무량에 허우적거리다 결국 사직을 택한 그녀는 ‘일 시키는 사람들’, 즉 자신의 윗세대 사람들의 태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같은 20대들은 일 많이 시키고, 돈 적게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됐는데도, 거기다 추가로 또 다른 일을 떨어뜨리면서도 주는 돈은 그대로예요. 정말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지금의 20대들은 〈88만원 세대〉 저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한 명씩 자신의 골방에 ‘은폐’되어 고립되고, 파편처럼 공격받으며 기성세대들의 희생양”이 되거나 “개인적으로 지독한 우울증 속에서 경제적 소수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세대로 보인다. 채혜원씨는 ‘88만원 세대’를 “돈을 쥐기도, 짱돌을 들기도 어려운 세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급속하게 무한 경쟁 체제에 내몰린 데다 자기 요구를 내건 변변한 사회적 저항을 해본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난 9월12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간 코스콤 비정규직의 사례는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강철민씨와 고영준씨는 한때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의 3분의 1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무려 30여 년 동안 차별을 감내해온 선배들의 침묵이 원망스러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배들이 앞장서 싸워줌으로써 자신도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사람답게 일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자의 권리’란 말도 알게 됐다.

물론 KTX 여승무원이나 뉴코아·홈에버 비정규직의 경우처럼 앞길이 평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던진 ‘작은 짱돌’ 하나하나가 없었다면 세상은 ‘88만원 세대’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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