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출신 선배들의 최근 활약을 보고서야 비로소 육사 출신으로서 선후배 간에 전우애와 정의감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12년 전 판문점 경비소대에서 의문사한 소대장 김훈 중위와 동기(육사 52기)인 한 현역 소령은 최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한 육사 출신 선배들의 침묵 앞에 말할 수 없는 자괴감과 우울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대장 출신 선배란 오영우 육사 총동창회장(전 1군사령관)과 서종표 국회 국방위 민주당 의원(전 3군사령관)을 가리킨다. 두 사람은 최근 김훈 중위 모교인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와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을 무대로 그동안 군 수뇌부가 회피해온 김훈 중위의 순직 처리와 국립묘지 안장 등 명예회복 조처를 적극 촉구하고 나섰다.

ⓒ뉴시스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대법원 판결은 자살로 나왔다”라고, 사실과 다른 답변을 했다.

오영우 육사 총동창회장은 지난 7월 초부터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김훈 중위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취지의 청원서를 냈다. 법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김훈 중위는 순직 처리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육사 총동창회의 경우 현직 군 수뇌부와 마찰이 생길 만한 불편한 사안에는 나서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부가 껄끄러워한다고 해서 김훈 중위 사건 같은 일에 침묵하게 되면 오히려 군에 더 불명예가 된다는 충정 속에 육사 출신들이 총의를 모아 나서게 됐다고 오영우 동창회장은 말했다(32쪽 인터뷰 참조).

서종표 민주당 의원은 10월22~23일 계룡대 및 국회에서 벌어진 국정감사장에서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황의돈 육군 참모총장을 상대로 김훈 중위의 명예회복 조처를 촉구했다. 그는 김훈 중위 사건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법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현재 군 당국이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주장을 여전히 굽히지 않는 가운데 그의 유골은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있는 1군단 헌병대의 한 부대 막사 창고에 12년째 방치돼 있다. 김훈 중위 사건은 초기부터 군대 의문사 문제를 사회적 인권 어젠다로 부각시키고, 구멍 뚫린 판문점 경비 체제에 경종을 울려 군기 문란을 바로잡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하지만 그만큼 군 수뇌부에게는 ‘골칫거리’로 여겨져 끝없는 배척과 외면의 대상이 되었다.

군 출신들 사이에서 김훈 중위를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널리 번지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군 수사당국을 제외한 3대 국가 주요 기관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자살은 아니다’라는 쪽으로 판정함으로써, 더 늦기 전에 국방부가 이를 받아들여 사건을 수습해야 할 국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3대 주요 국가기관은 국회와 법원, 그리고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말한다.

대법원 판결도 왜곡하는 국방부의 오만

먼저 국회는 1999년 국방위 산하에 ‘김훈 중위 사건 진상규명소위원회’를 두고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국방부 특조단이 김훈 중위 사건을 자살이라고 발표한 직후인 1999년 5월31일 부실 수사에 대한 의문 15가지를 제기하며 ‘김훈 중위는 타살당했다’는 요지의 활동 보고서를 펴냈다. 또 2000년 5월에 낸 2차 보고서에서는 국회에서 군에 요구한 총기 발사 실험 결과를 중심으로 김 중위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점을 재확인하며 명확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서정표의원실10월22일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장에서 서종표 의원이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해 국립묘지에 안장하라고 촉구했다.

사법부도 군 수사기관의 손을 들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김훈 중위 유족은 2000년 군을 상대로 ‘은폐 조작을 통해 사인을 자살로 몰아 정신적 피해를 입힌 데 대해 배상하라’는 요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 재판 과정에서 각급 법원은 ‘군 수사기관의 초동수사 잘못으로 이 사건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요지로 판결했다. 2004년 2월17일 서울고법은 “이 사건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들고, 유족들에게 은폐 조작 의혹을 갖도록 만든 책임은 군 사법경찰관에게 있다”라고 판시한 뒤 12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확정판결 역시 군 수사기관의 초동수사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 부실 수사 책임을 물은 원심을 확정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11월2일 김훈 중위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군 수사당국의 자살 결론을 수용할 수 없지만, 타살 범인을 잡아내기도 어렵다며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의문사위는 이 과정에서 군 수사당국이 김훈 중위 사건을 자살로 몰아가기 위해 왜곡·날조한 사실을 상당 부분 밝혀냈다. 과거 특조단에서 김훈 중위가 자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을 부각한 데 대해 위원회는 조사 결과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자살 동기와 징후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밝혀냈다.

바로 이 같은 국가기관들의 결정과 조사 내용을 토대로 양심 있는 육사 출신 군 장교들 사이에서 김훈 중위에 대한 명예회복 운동이 촉발된 것이다. 이들은 김훈 중위가 여러 국가기관의 조사 결과 자살이 아니라는 개연성을 충분히 인정받았고, 공무 수행 중 사망한 사실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없으므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1항 5호 및 제6항 4호에 의해 순직 군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직 군인이 국가유공자가 되려면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보훈처장에게 등록 신청을 하고, 그 소속 기관장, 즉 국방부 장관이 그 요건과 관련된 사실을 확인해 보훈처장에게 통보해주면 된다.

문제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어떤 자세를 보여주는가이다. 그러나 김 장관은 천안함 사건 때 보여줬던 모습과 판박이로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서도 ‘거짓말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10월22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감장에서였다.

ⓒ시사IN 안희태경기도 벽제 1군단 헌병대 창고에 12년째 방치되어 있는 아들의 유골 앞에서 김훈 중위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이날 서종표 의원은 김 장관을 상대로 “법률적으로 자살은 아니라고 나왔으니 장관 재임 기간에 김훈 중위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라고 운을 뗐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에서는 이 사건을 자살로 인정했다. 유일하게 군의문사진상규명위만 자살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 대법원이 자살로 판결한 사건을 순직 처리하려면 단순히 육사 동창회에서 해달라고 한다고 해서 들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큰 정책 변화가 요구된다.”

천안함 사건과 닮은 거짓 답변

김태영 장관의 이 답변은 명백한 위증이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가족의 한 맺힌 가슴에 또다시 대못을 박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이 자살로 나서 법적으로 군에서 처리할 수 없는 것을 부모가 억지로 우기고 있다. 사건을 뒤로 미루는 것은 군이 아니라 김훈 중위의 부모다.”

김 장관의 발언이 끝난 뒤 서종표 의원은 군이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법원 판결문 일부를 읽어나갔다. “이 사건 초동수사를 담당한 군 사법경찰관은 현장 조사와 현장 보존을 소홀히 하고 주요 증거품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대원들에 대한 알리바이 조사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 형식적으로 하는 등 그 잘못이 적지 않다.…이와 같은 초동수사는 조사 활동 내지 수사의 기본 원칙조차 지켜지지 아니한 채 행해진 것으로 경험칙과 논리 원칙에 비춰 도저히 그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명백한 하자가 있다.”

이를 듣고 당황한 김 장관은 “판결문은 보지 못했고 (참모가) 그렇게 보고를 해서…”라고 얼버무리며, 대법원 판결문을 읽어본 뒤 다시 답하겠다고 발을 뺐다.

육사 선후배인 김척 장군과 고 김훈 중위 부자가 국방에 헌신한 기간을 합치면 모두 42년이 넘는다. 그러나 군과 국방당국은 법원과 다른 국가기관들도 인정한 두 군인 부자의 명예를 끝까지 외면하려 하고 있다. 국방을 위해 헌신하다 억울하게 죽은 청년 장교 김훈 중위의 유해를 12년간 군부대 창고에 방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공정 사회’와 ‘정의’의 기치는 공허할 뿐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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