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부토 전 총리를 노린 저격과 자살폭탄 테러가 벌어진 뒤 부토 지지자들이 울분을 토하고 있다
지난 12월27일 밤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은 ‘올해의 10대 국제 뉴스’ 리스트를 다시 짜야 했다. 이날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옆 펀자브 주 라왈핀디에서 총선 유세를 하던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저격당했다. 부토 여사는 독재자 무샤라프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인 야당 지도자였다. 그녀를 쏜 범인은 현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자살했다.

지난 11월5일부터 12월8일까지 파키스탄에 머물며 민주화 투쟁을 취재했던 김영미 프리랜서 PD는 부토 여사를 만나 대화를 나눈 마지막 한국인이었다. 김영미 PD는 〈시사IN〉에 보낸 긴급 기고에서 부토 여사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파키스탄 발전 모델로 여겼다고 전했다(편집자 주).

어제(12월27일) 밤 10시쯤 파키스탄 아즈TV에서 앵커로 일하는 친구 인티사르 울하크가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거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누군데?” “부토.” 한동안 서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부토가 테러당한 그 시위를 취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바로 몇 분 전에 병원에서 사망 사실을 들었다고 했다.

충격적 소식에 놀라면서도 나는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면 한 달 전 부토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나에게 했던 것이다.

부토를 만난 날은 파키스탄 북서부 페샤와르에 머무르고 있던 2007년 11월20일이었다. 당시에도 부토는 테러 공포 속에 싸여 있었다. 이미 서너 차례 자살 폭탄 테러 공격을 간신히 피한 몸이었다. 페샤와르 방문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지만 1월8일 총선을 위해 지방 유세가 필요했다.

부토는 나를 포함한 기자 7명과 함께 PPP(파키스탄 인민당) 페샤와르 지구당사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암살을 우려한 경호원들은 가방과 개인 소지품도 들고 갈 수 없게 했다. 테러가 무서운 것은 부토뿐만이 아니라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간담회에 동석했던 〈더 뉴스〉 신문의 샤라아트 기자는 “부토와 만나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녀를 노리는 테러에 덩달아 내가 희생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빨리 간담회를 끝내고 당사를 떠나고 싶다”라고 나에게 속삭였다.

1시간여를 기다린 뒤 오후 1시쯤 마침내 베나지르 부토가 나타났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르카를 둘러쓰는 보통 파키스탄 여성과는 달리 부토는 머리칼만 가리는 하얀 얇은 히잡을 쓰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기자들을 만나는 그녀의 첫인상은 서양 스타일의 ‘세련된 정치인’이었다. 미인이고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 그녀는 카리스마 있는 야당 지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영자신문사 기자들이 있고 외국인인 필자가 있었기 때문인지 부토는 영어로 이야기했다. “1월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십니까?”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녀는 이런저런 설명을 하다가 돌연 나를 보며 한국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에 한국 여자 저널리스트가 와 있으니까 한국 역사에 비유하겠습니다. 한국의 민주화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국인들이 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피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런 파키스탄 민주화 과정의 산 증인입니다. 그 과정이 모두 지난 후에 우리도 한국과 같은 민주화를 이룰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들 희생이 필요합니다.” 부토는 한국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나에게 “여자 저널리스트로서 파키스탄에서의 취재가 어렵지 않느냐? 한국인들은 파키스탄의 민주화에 관심이 있느냐?”라며 되물었다.

부토가 말한 ‘민주주의를 위한 피’는 아마도 독재자 지아 울하크에게 처형당한 아버지를 뜻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 달 뒤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예고가 되고 말았다.

부토 전 총리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다. 총리 시절 부패에 연루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필자가 보기에 그녀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넘쳤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당당해 보였다. 필자는 부토에게 “테러 위협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그녀는 “이곳이 나의 조국이다. 테러 위협이 있는 이곳 파키스탄이 부토라는 정치인이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임을 나는 인정한다”라고 대답을 했다.

“부토 암살은 무샤라프와 탈레반의 합작품”

간담회 전날 부토는 페샤와르에서 유세 연설을 했다. 시민의 지지는 대단했다. 그녀에게 꽃을 뿌리고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연설을 들으려는 군중들 때문에 아우성이 일곤 했다. 지지자들은 “진다해 부토! (부토는 살아 있다!) 진다해 부토!”를 끊임없이 외쳐댔다. 몰려든 군중이 1만여 명은 넘어 보였다. 보디가드 수십명에 에워싸이면서도  지지자들의 환호에 일일이 손을 흔들며 당차게 연설하던 파키스탄의 전 총리 부토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김영미2007년 11월19일 부토가 페샤와르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누가 그녀를 해친 것일까? 파키스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구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크게 두 세력을 의심한다. 첫 번째는 탈레반이다. 미국 유학으로 서구적인 문화 양식을 지진 그녀를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탈레반들은 공공연히 협박하곤 했다. 지난 붉은 사원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는 탈레반 사령관 오마르는 “베나지르 부토는 우리 이슬람에 맞지 않다. 미국의 비호를 받고 있는 부패하고 세속적인 여자이다. 그녀가 귀국해서 활동하면 즉각 암살하겠다”라고 공언해왔다.

파키스탄 지역 탈레반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헤럴드〉지 기자 샤디프는 지난 12월27일  전화통화에서 “탈레반은 부토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부르카 대신 쓰고 다니는 히잡을 보라. 나는 그 히잡만으로도 탈레반은 충분히 그녀를 살해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탈레반이 있는 한 부토는 언젠가는 암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라고 말했다.

다른 의견도 있다. 파키스탄의 대통령 무샤라프가 그 배후에 있고 파키스탄 정보국이 일을 꾸몄다는 관측이다. 12월 중순 국가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2008년 1월 총선거를 앞둔 무샤라프에게 부토 전 총리는 결코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토 전 총리는 연설 때마다 무샤라프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국민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녀가 이끄는 인민당(PPP)은 선거 유세의 목적을 무샤라프 퇴진으로 명시하고 지속적으로 무샤라프에게 하야할 것을 요구했다. 파키스탄 민영방송 아즈 티브이(AAJ TV) 기자 파칼 씨는 “국민의 대부분이 미국과 절친한 무샤라프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와중이라 부토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그들에게 베나지르 부토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이런 상황이 무샤라프에게는 많은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 1월8일이 오기 전에 그녀를 제거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뒤이은 혼란을 빌미 삼아 다시 비상사태를 선포해 국민의 입을 막을 전략인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했다. 부토는 지난 10월26일 자신의 미주 지역 대변인 마크 시겔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만약 내가 테러를 당한다면 그 책임은 무샤라프에게 지울 것이다. 그동안 나는 무샤라프의 앞잡이들 때문에 신변 불안을 느껴왔다”라고 썼다.

탈레반과 무샤라프 외에도 부토에게는 정적이 많았다. 필자의 전화를 받은 파키스탄 언론인들은 부토 암살의 배후에 대해 “탈레반과 무샤라프의 마지막 합작품일 것이다. 행동대원은 탈레반, 배후는 무샤라프다”라고 대답했다.

파키스탄의 불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당장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지도 미지수다. 2007년 11월 초 국가 비상 사태 선포 후 두 달여간 파키스탄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와 충돌이 있었지만 그래도 시민과 정부는 마지노선은 지켜왔다. 바로 총을 쏘지 않는 것이다.

파키스탄에서 총기 구입은 쉬운 일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총을 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시위대와 경찰 모두 총격만은 자제해왔다. 그러나 부토 사망 직후 양측은 인내심을 잃고 서로 총격을 벌이고  있다.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11월20일 부토와의 마지막 간담회 때 그녀가 전해준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지난 11월4일 무샤라프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두바이에 있던 그녀는 황급히 비행기를 타고 카라치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토는 비행기에서 다섯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아 기다리던 사람들을 걱정시켰다. 이 일에 대해 부토는 기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난 그때 객실안에서 과연 지금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언제 체포될지도 모르고, 암살·테러 경고도 많았다. 두바이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끝내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기로 결심했다.”

만약 그때 부토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고 도로 두바이로 돌아갔다면 오늘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부토는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사를 예로 들던 부토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자명 김영미 (프리랜서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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