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 번호를 확인한 김복남씨(가명·38)의 얼굴이 환해졌다. 3시간 전 맞선을 본 상대 남자의 전화였다. 포항에서 서울로 선을 보러 오는 데만 왕복 8시간이다. 금색 프릴 블라우스에 허리가 잘록해 보이는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꽃무늬 재킷으로 힘을 준 그녀는 선보기 하루 전날 찜질방에서 잠을 잤다. 맞선 당일 찾은 곳은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한 결혼정보업체였다. 북한 여성과 남한 남성의 주선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구청 공무원인 맞선남에게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녀도 중국에 두고 온 여덟 살짜리 아들이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둘은 짧은 만남을 가졌다. 온화하고 성격이 괜찮더라고, 탐색전을 마친 그녀가 인상을 풀었다.
 

ⓒ뉴시스부산의 한 대학에서 2007년 10월21일, 탈북자 다섯 쌍이 합동 결혼식을 올렸다. 남남북녀 커플은 더 이상 영화 속 비극의 소재가 아니다. 가까운 우리 주위에 있다.

함경도 청진이 고향인 그녀는 2002년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떠돌다 2006년 남한에 들어왔다. 탈북은 우연이었다. 장마당(시장)에서 웬 아주머니가 중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북한 여성을 중국으로 넘기는 브로커였다. 북한에 계속 있다가는 배만 주릴 게 뻔했다.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라도 덜고 싶었다. 언니와 오빠, 부모를 떠나 중국에 간 그녀는 한 조선족 남자 집에 팔려갔다. 인신매매라고 하지만 그녀로서는 먹고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집을 간 좁은 시골집은 시부모·시동생으로 늘 북적거렸다. 북한에서 온 그녀를 무시하는 일이 잦았고 못 견디게 서러웠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에도 김씨는 탈북자 신분이라 늘 불안했다. 중국 공안에 잡힐까봐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우연히 재회한 고향 친구가 남한에 가는 법을 일러주었다. 도망쳐 나온 뒤 한 목사의 도움으로 남한에 올 수 있었다.

입국자 수 남성보다 두세 배 많아

김씨는 그간의 기억이 하도 서러워 하나원(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에서 나올 때도 일부러 남쪽인 포항에 둥지를 틀었다. 북한과 가까운 강원도는 가기도 싫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늘 혼자였다. 가족들이 모이는 추석과 설이 제일 싫었다. 외로웠다. 결혼을 결심한 건 그래서였다. 현재 직업교육을 받고 있는 그녀는 “경제적인 것보다도 나를 끔찍이 위해주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에서 온 남자는 싫다. 북한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서다. 가급적 다 잊고 지내고 싶었다. 오후 업무를 마친 맞선남의 전화를 받은 그녀는 조금 뒤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쟀다.

남남북녀. 남한 남성과 북한 여성을 중개하는 결혼정보업체 대여섯 곳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다. 영화에서 비극의 소재로 쓰이던 남남북녀·북남남녀 커플이 현실에서는 결혼에 골인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10월 말 현재 우리 사회는 탈북자(새터민) 2만명 시대를 앞에 두고 있다. 1950년 첫 귀순자 이후 2006년 2000명대를 돌파한 뒤 5년 사이 10배 가까이 불어난 것이다(36쪽 표 참조). 지난 8월 기준으로 한국에 온 탈북자는 1만9569명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이 약 80%다. 2000년까지는 여성이 50% 미만이었지만 2007∼2009년에는 평균 77%를 넘어섰다. 2000년 이후 국내에 들어오는 남성은 한 해 평균 500명 정도지만 여성 입국자 수는 남성의 두세 배로 증가 추세다. 그 가운데 20~40대 여성이 약 80%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서울에만 1000쌍 이상의 남남북녀 커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 탈북자가 단기간에 갑자기 늘어난 건 북한의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식량난이 장기화되면서 가족 부양 책임이 남성에서 여성에게 넘어갔고, 생계를 궁리하던 여성 가장이 중국으로 건너왔다가 남한에 정착한 경우가 적지 않다. 탈북자 최초로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애란 교수(경인여대)는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서 가족 부양과 식량 구입을 위해 여성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성 역할의 변화가 왔다”라고 전했다.

여성 신분이 중국으로의 이탈을 용이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조선족 브로커가 북한 여성의 신상 정보를 수집해 중국 본토에 팔아넘기기 때문이다. 국경 지역에는 북한 여성의 음란 화상 채팅과 성매매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남자는 10대부터 군대에서 10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성보다 엄격하게 통제·관리의 대상이 되는 점도 국내로 입국하는 성비 차이의 원인이다.
 

ⓒ뉴시스자 대상 취업박람회를 찾은 탈북 여성이 채용공고란을 꼼꼼히 보고 있다.

최근에는 남한에 먼저 정착한 친척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남한으로 오는 탈북자도 있지만, 많은 젊은 여성이 굶주림을 못 이겨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중국과 미얀마(버마)·타이 등 제3국을 수년간 떠돌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입국한다. 지난해 1월 기준 단독 입국자 비율(70.7%)이 동반 입국 비율(29.3%)을 크게 웃돌았다. 탈북 여성들은 남한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한 남성과의 결혼을 선호한다. 강수진 탈북여성인권연대 대표도 북한 여성과 상담할 때 적응의 ‘지름길’이라며 결혼을 권한다. “말씨만 다른 게 아니라 다른 체제 아래서 살았기 때문에 문화가 완전히 다르다. 배우자를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다.” 그녀의 동생 강옥실씨도 남한 남성인 홍승우씨와 결혼해 탈북 여성 전문 결혼정보업체를 운영 중이다. 

5년 전 강씨와 결혼한 남편 홍승우씨는 이혼하고 아들 둘을 키우다 그녀를 만났다. 자식이 둘 달린 홀아비와 아무도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강씨는 달랐다고 한다. “북에서 온 여자들이 아직까지 덜 세속적이라고 해야 하나, 재산이나 조건을 덜 따진다. 본인 스스로 기반이 덜하기도 하고. 그런 걸 선호하는 분들이 있다.” 그는 그걸 ‘더 순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장점도 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탈출해 여기에 이른 사람이라 강인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자립 힘들자 결혼에 희망을 걸다

결혼정보업체를 찾는 남성들은 직업도 다양하다. 업체에 따르면, 30대가 가장 많고 재혼을 원하는 전문직 남성·공무원·자영업자 등 다양하다. 수년간 교제하다 더 조건이 좋은 남자에게 가버린 옛 애인에 환멸을 느끼고 북한 여성을 찾는 남성도 적지 않다고 한다. 북한 여성이 더 예쁠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미모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간혹 무직자나, 몸과 정신이 불편한 사람들이 돈만 주면 여성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상담을 신청하기도 한다.

‘더 순수하다’는 표현에는 북한 여성이 ‘좀 더 감내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결국 탈북 여성이 소수자인 동시에 사회적 약자임을 지목하는 말이기도 하다. 400여 쌍을 이어준 탈북자 결혼정보업계 베테랑 최영희씨도 탈북 여성을 낮춰 보고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을 여럿 보았다. 한국에 온 지 한 달도 안 된 탈북 여성과 첫선을 본 날 결혼하겠다며 잠자리를 가진 뒤 다음 날 다른 여자를 소개해달라는 식이다. 여성과 동거하며 정착금만 빼먹는 남성도 있다.
 

기자가 사무실을 찾은 날, 최 대표가 전화로 고객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혼한 40대 아들을 결혼시키려는 부모와의 전화였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해요. 몇 번째인가요.” 이 의뢰인은 궁합이 중요하다며 선도 보기 전에만 네 명을 퇴짜놓았다. 최 대표는 “탈북 여성들이 어떤 고생을 해가며 여기까지 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짝을 이어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전문상담사인 탈북 여성 이하영씨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결혼을 선호하는 건 남한 사회에서 편견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취업을 할 때도 써보기도 전에 탈북자라 무조건 싫다는 사람들이 있다. 자립이 힘들어 결혼에 더 희망을 품는 건 아닌가 싶다”라고 말한다. 남녀 구성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탈북자 전체 고용률은 남성이 61.7%로 여성 37.8%에 비해 높다.

초기 정착 과정에서 이방인으로 설움을 느낀 탈북자 중에는 자식만이라도 남한의 젊은이를 배우자로 맞기를 바라는 부모가 많다. 남한에 온 지 8년이 된 이정화씨(48·가명)는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한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나라에 와서 나라 없는 설움을 확실히 알았다. 1년간 서울 양천구의 한 지하상가 아웃렛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동안 같은 일을 하는데도 남한 사람들이 시급 3500원을 받을 때 이씨는 2800원을 받았다. 조선족이냐고 물으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이 사회의 바닥을 벗어나는 게 요원한 일임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등학생 딸과 대학생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도 여기서 가난한데 또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어찌 되겠나. 북조선 사람을 만날 생각은 버려라.”

그렇지만 청춘남녀의 결합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 마음이 맞아 자연스레 연애를 한 남녀도 넘기 힘든 벽에 부딪힌다. 부모와 친지의 반대 때문이다. 최화진씨(55·가명)는 재작년 딸을 시집 보낼 때 기억을 더듬으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딸이 입국하고 얼마 안 돼 연애를 시작했다. 왜 하필 북한 여자냐고 시댁에서 그렇게 결사 반대를 했다. 딸과 결혼하면 계속 감시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하더라. 갓 왔으니 돈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위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손녀를 얻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북남남녀의 결혼 분투기도 눈물겹다. 이효석씨(37·가명)와 부인도 1년간 집안의 반대가 이어졌다. 탈북자 지원센터에서 관련 업무를 하던 부인을 만나 3년간 연애를 했다. 그는 장인과 장모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싸움도 많이 했다고 말한다. “북한 사람들이 원래 지고 들어가는 걸 잘 못한다. 예의가 없다고 싫어하시고 쫓겨나기도 했다.” 부모는 결국 허락했지만 결혼식 당일, 썰렁한 신랑 하객석을 보며 그는 신부보다 더 큰 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그는 남남북녀·북남남녀 커플 중 잘사는 부부는 1000쌍 중 1쌍도 안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3년간 봐온 사람들이 그랬다. “물정을 잘 몰라 남자한테 속는 여자들이 많다. 집이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빈털터리인 경우도 흔하다. 결혼정보업체도 남자한테만 돈을 받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그냥 한번 만나나 보라는 식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잘사는 커플도 있다. 결혼 3년차 장훈민씨(38·가명)는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했다. 30년을 넘게 다른 체제에서 살아 문화적인 차이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어떤 부부라도 신혼 초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특별할 것 없이 가끔 다투고 다시 풀어지고, 여느 부부처럼 잘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 결혼 이후의 삶이다.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북한이탈주민 여성 실태조사 및 지원정책안 연구’를 보면 탈북 여성의 결혼 지속 기간은 5년 미만이 31.1%로 가장 많았다.  5년 이상 10년 미만이 17.4%, 30년 미만이 11.1%다. 흥미로운 점은 남편과 갈등이 생겼을 때 북한 남성이 모욕적인 언사나 욕을 주로 하는 데 반해, 남한 남성은 생활비를 주지 않거나 외출을 금지시키는(14.8%) 비율이 높았다. 경제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동독 여성, 남성보다 통일 적응 빨라

통일 독일의 옛 동독 지역에서는 요즘 여성 기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동독 출신 여자가 사회 빈민층으로 전락할 거라는 염려를 깨고 자원이 많은 서독 지역에 진출해 사회활동을 활발히 벌였기 때문이다. 서독 출신 남성과의 결혼도 늘었다. 현재 독일을 이끌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동독 출신 첫 여성 총리이다.

지난 6월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우르줄라 맨레 독일 바이에른 주 의원은 우리 사회가 탈북 여성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여성을 통해 북한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남한 사회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혼란을 줄여 빠른 적응을 돕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도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탈북 여성이 늘어날 때 어쩌면 곧 닥칠지 모를 통일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탈북자 정착을 돕는 ‘희망과 나눔 연대’ 변광영 대표는 “탈북자 2만명 시대를 맞아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 통일시대 가교 역할을 할 탈북자를 우리 사람으로 받아들이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