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선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선거전에 돌입하기에 전 대통령이든, 총선 출마자건, 장삼이사건 간에 가쁜 숨을 한 번쯤 고르자. 제주 올레에까지 올 수 없다면 자기 동네 올레라도 어슬렁거려보자.
왕년의 〈시사저널〉에서 편집장을 하던 시절, 나는 지나치리만큼 열심히 일했다.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아니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도 어떤 기사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후배들을 심하게 닦달했음은 불문가지다.

그런 부지런함과 극성으로 일정한 성취를 일궈냈지만, 실은 잃은 것이 훨씬 많았다. 심신의 건강에 적신호가 울렸고, 남편과 자식을 외롭게 만들었고, 주위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리더로서 저지른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의 창의성과 활력을 떨어뜨렸다는 점이었다. 편집장을 그만둘 즈음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잘못된 방향으로, 방향성 없이 부지런을 떠는 건 게으른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언론사 생활을 접은 뒤에 자동차는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도 아닌, 가장 느린 자신의 두 발로 걷기를 작심한 데에는 ‘지나치게 빨랐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 작용했다. 스페인 서북쪽 끝에서 동북쪽 끝까지 800km에 이르는 도보여행 코스 ‘산티아고 가는 길’을 36일 동안 걸으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고 깊은 성취감을 느꼈다.

속도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기

나는 그제서야 프랑스 지식인들이 ‘플라뇌르(천천히 걷는 사람, 게으름뱅이)’를 찬미하는 이유를, 우리의 옛 선비들이 뒷짐을 지고 소요하기를 즐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0세기의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그 스스로가 플라뇌르를 즐겼던 창조적 인물인데, 그가 손꼽는 대표 플라뇌르가 다름아닌 악성 베토벤이었다. 그는 집 밖을 어슬렁거리면서 배회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악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나는 고향 제주도에 걷는 길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평화, 그리고 부질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과거와 미래를 돌아볼 여유를 길 위에서 누릴 수 있도록. 너무도 부지런히 사는 나머지 스스로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한순간이나마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어)’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2007년 9월8일 첫 코스를 개장한 이래 3개 코스를 선보였고, 그 사이에 제법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그와 더불어 ‘간세다리 정신’도 조금씩 전파되기 시작했다. 제주 올레 행사에 참가했던 한 초등학교 어린이는 서울로 돌아온 뒤 북한산을 습관대로 속도전으로 등정하는 자기 아빠에게 ‘어허, 간세다리 정신! 벌써 잊었어요?’라고 점잖게 충고했다던가.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근면을 치켜세우고 속도를 숭배하는 풍조가 팽배하다. 근면은 어떤 경우에도 미덕이요, 속도는 곧 힘이다.

벌써부터 성질 급한 정치권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공천이 어쩌고저쩌고 주판알을 튀기느라 여념이 없다. 국민은 새 대통령이 선출되자마자 경제 호전을 기대하는 목소리를 봇물처럼 쏟아낸다. 부동산 시장은 기대심리에 벌써부터 출렁인다.

이명박 당선자도 예외는 아니다. 선거전 당시에도 아침에 맨 먼저 일정을 시작하고, 밤 10시 이전에 일정을 끝내본 적이 없는 ‘부지런한 명박씨’였다. 그런 당선자답게 ‘5년이라는 세월도 금방이다. 하루도 허투루 허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견주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편집장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이 당선자의 부지런함이 외려 걱정스럽다. 5년이라는 세월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엄청 긴 시간.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쯤은 어슬렁거릴 필요도 있는 게 아닐까.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닐까.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선거전에 돌입하기에 전 대통령이든, 총선 출마자건, 장삼이사건 간에 가쁜 숨을 한 번쯤 고르자. 제주 올레에까지 올 수 없다면 자기 동네 올레라도 어슬렁거려보자.
그런 연후에 다시 시작하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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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서명숙 (편집위원·〈제주 올레〉 이사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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