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대입구역 근처에 ‘수상한 장소’가 하나 생겼다. 널찍한 창문으로 햇살이 잘 들어오는 대로변 건물 2층, 80㎡ 규모의 이곳은 책장과 열람석으로 꾸며져 있다. 그런데 서가에 꽂힌 책들이 예사롭지 않다. 대부분 미소년들이 표지 그림을 장식했다. 게다가 그들은 거의 몸을 포개고 있다.

10월12일 ‘BL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BL’은 ‘보이스러브(Boys Love)’의 줄임말로, ‘야오이’와 함께 (주로 미소년인) 남성 캐릭터들 간의 사랑을 성적 혹은 낭만적으로 표현한 만화·소설 등을 일컫는다. 김부용(29)·유민형 씨(33) 부부는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로 이 장르의 책들만 모아 도서관을 열었다. 1991년 이후에 태어난 청소년은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들은 책이 아닌 커피가 주가 되는 ‘북카페’ 대신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공간이 생겼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워 도서관 이름에 물음표(?)와 느낌표(!)도 포함시켰다. 아직은 장서 수가 빼곡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원서와 관련 논문까지 갖출 예정이다.

누가 와서 볼까? “서울 사당동에 있는 SF 도서관을 모델로 계획했는데, BL 마니아가 SF 마니아보다는 많다는 생각에 자신감을 얻었다”라는 유씨 말처럼, BL을 즐기는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다. 학창 시절 때부터 BL을 즐겨온 송 아무개씨(23)는 “BL물을 사거나 직접 창작하는 등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이 적어도 1만~2만명은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아마추어 만화 행사 ‘코믹월드’에서도 BL  관련물을 유통하는 부스가 300곳 이상 들어설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BL을 즐기는 문화는 매우 다양하다.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한국 작가들이 창작해 출판한 만화·소설 단행본을 보기도 하고, 기존의 텍스트들을 BL물로 패러디한 아마추어 창작자들의 작품이 유통되기도 한다. 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짝지은 BL 팬픽(Fan Fiction:팬이 쓰는 소설)도 인기를 끌며, 그것들을 재현하는 코스프레(게임이나 만화 캐릭터 분장)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1970년대부터 숱한 만화와 잡지로 BL 문화를 부흥시킨 일본과 영화 〈스타트랙〉과 〈반지의 제왕〉 남성 캐릭터를 동성애 커플로 탄생시킨 미국·유럽·오스트레일리아까지, BL은 가히 전 지구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BL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야한 부분이 꽤 등장하는 장르인데도 ‘산삼(山蔘) 동인남’(산삼처럼 귀하다는 뜻. BL 장르를 즐기고 창작·유통하는 여성들을 주로 ‘동인녀’라 부른다)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남자들은 BL을 꺼린다. 논문 〈야오이 세계의 연구〉(2005, 박성희)에 따르면 야오이를 접한 중·고등학생들 가운데 야오이에 흥미를 느낀다는 남학생(15.7%)은 여학생(50.7%)에 비해 현저히 비율이 낮았다. 물론 BL을 즐기는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민형씨는 “스토리의 갈래가 다양하고 개그 코드도 센스가 있어서 BL을 재밌게 본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산삼 동인남’은 아닐지라도 ‘인삼(人蔘) 동인남’이라는 말은 유효할 정도로 유독 여자들이 BL을 즐기는 건 사실이다. 여자들이 느끼는 BL의 매력은 성적인 텍스트임에도 ‘편안함’이 있다는 점이다. 김부용씨는 “보통 이성애 성관계를 다루는 작품들은 남자를 위한 것이라 여자들이 보기에 개운치 않은 부분이 많은데, BL은 그것이 역전되는 즐거움이 있다”라고 말했다. BL 작품 속에는 성적인 대상이 되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으니 당사자인 여성이 오히려 편안하게 성적인 것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배우들(맨 위)과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들(가운데),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위) 등 숱한 남성이 BL 마니아들의 ‘커플링’ 대상이 됐다.
이 때문에 일부 수위가 높은 BL은 ‘여성을 위한 포르노’로 불리기도 하지만, 성관계 자체만을 중시하는 ‘남성을 위한 포르노’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성관계를 표현하면서도 결코 로맨스에 대한 환상과 서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BL 등 일본 오타쿠 문화를 연구한 〈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에서 저자 에티엔 바랄은 남성 동성애에 관한 여성들의 묘사에 대해 “성과 사랑의 감정은 이상화하면서 남녀 사이의 ‘진부한’ 관계가 현실 속에서 발생시키는 사회적 심리적 제약에 섹슈얼리티나 사랑을 결부시키기를 거부하는 젊은 여성들의 의지를 반영한다”라고 분석했다.

“BL 문화는 남성들을 탈권력화·희화화한다”

여성들이 BL에서 얻는 또 다른 재미는 ‘관계 놀이’이다. BL은 두 남성의 관계성을 조합하는 일종의 역할극인 셈이다. 그래서 마니아들은 문화 콘텐츠 속 애먼 남성들을 무수히 커플링(남남 커플을 짝으로 엮는 일)시킨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예쁘장한 멤버들은 물론이고 드라마와 영화에서 남자들의 우정과 배신을 연기한 배우들과 함께 운동장을 누비는 국가대표 축구선수들, 심지어 애증 관계를 농도 짙게 보여주는 정치인들까지도 커플링의 대상이 된다.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 능력에 관한 연구〉(박세정, 2006)에서는 이렇게 남성들 간 관계를 비트는 작업들이 “특권화돼온 남성 주체들을 탈권력화하고 희화화한다”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사회 속 복잡한 성과 권력의 관계를 은유하는 까닭에, BL은 국내 여성학계에서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언론 등에 의해 질타받는 10대 BL 팬픽 문화에 대해 ‘성인 중심적·남성 중심적·이성애 중심적 한국 문화지형 안에서 10대 여성들이 섹슈얼리티와 정체성을 실험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박세정)으로 평가하고, BL 장르의 발전을 ‘성차로 인해 개입되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나 성적 착취를 거부하고 평등한 존재 간의 사랑과 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순정만화의 젠더 전복 모티브에 나타난 앤드로지니 환상과 젠더화의 불만〉, 정승화, 2008)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BL을 즐기는 사람들은 선뜻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마니아들이 모여 정보와 작품을 공유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는 비공개 공간이며 회원 관리도 매우 철저하다. 한 회원은 “이런 모임들은 기존 회원의 추천으로만 신규 회원을 받고, 한 회원이 잘못하면 그를 추천한 회원도 제재를 받으며, 주기적으로 회원 갈이와 주소 변경을 하는 등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매우 신중을 기한다”라고 말했다.

BL 도서관 개관 소식이 알려진 뒤 김부용·유민형 씨 부부는 마니아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이 BL 혹은 BL 동인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것이며, 그것들을 밖으로 노출시키는 행위 자체가 그렇지 않아도 눈총을 받던 BL 동인 문화를 사장시키는 결과밖에 낳지 못한다는 염려에서다. 앞으로 김씨 부부는 공간의 명칭과 비치 자료의 범위 등에 대한 이들의 비판을 일부 받아들여 수정할 의향을 밝히면서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즐겁게 BL에 관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공간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마니아는 “우리끼리 놀게끔 그냥 둬라”고 요구한다. BL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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