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우 편집국장
군부독재 시절 연예인들은 청와대에 불려가면 일단 얼차려부터 받았다고 한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까지는 아니더라도 ‘2열 종대 헤쳐 모여’ ‘동작 봐라’ 정도는 예사였다. 작고한 원로 코미디언 서영춘씨는 공연 중에 반드시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술이 과해 실수를 하는 바람에 같이 갔던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오리걸음으로 청와대 문을 기어 나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재벌 총수들도 청와대에 가면 ‘쪽을 못 썼다’. 대통령이 물어보면 반드시 차렷 자세로 대답해야 했다. 대통령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가는 옆방에 끌려가 정강이를 걷어 차이기도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 같은 이가 아얏 소리 못하고 보안사에 끌려가 민영 TV인 TBC를 빼앗기고 나오던 때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요즘 보수 인사들은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한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리라며 좋아한다고 한다. 그동안 엉망이었던 나라의 질서와 기강이 잡히리란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는 얘기이다. 밤마다 취객이 파출소를 때려 부수거나, 노조가 파업을 일삼는 ‘공권력 부재 현상’이 사라지기를 그들은 그동안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이명박 당선자가 그 어느 곳보다 앞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아간 것도 보수 진영을 들뜨게 했다. 당선자 시절에 벌써 재벌 총수부터 챙긴 이는 이명박 후보가 처음이라며 “역시 CEO 출신이라 다르다”라고 칭송한다. 이명박 당선자는 재벌 총수들과의 만남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 정부’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고, 재벌 총수들은 “투자를 늘려 경제를 살리겠다”라고 화답했다.

그런데 이날의 회동 사실을 전하는 국회사진기자단의 사진 한 장. 그 사진을 보면서 과연 이런 게 프렌들리한 사이인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속에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일반인에게도 너무나 친숙해진 이건희·정몽구·김승연 회장 등이 차렷 자세나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이명박 당선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왼쪽 가슴 상단에 모두 똑같은 형태의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얼굴이어서 가슴에 단 이름표가 더욱 생뚱맞다.

나름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일렬로 죽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 당선자와 미래에 대해 어떤 희망찬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순간만은 권위에 짓눌린 듯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하긴 이런 장면을 보며 비로소 권력이 본모습을 되찾았다고 뿌듯해한 사람도 적지는 않았겠지만.

기자명 문정우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mjw2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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