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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이 첫선을 보였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을 비롯해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이 전면에 나섰다. 비정치인 출신이 인수위원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박형준·정두언 의원처럼 이명박 색깔이 뚜렷한 소장 측근들은 한발 뒤로 물러선 대신 주요 포스트를 장악했다. 외부 전문가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측근들에게 정무적인 조정 역할을 맡긴 모양새다. 정치색을 배제하되, 현안은 당선자가 직접 챙기겠다는 뜻이다.

인수위 인사에서 가장 큰 화제는 역시 이경숙 위원장 인선이었다. 이경숙 카드는 이명박식 인사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흘러나온 일화가 둘 있다. 언론에서 몇몇 인사의 실명과 함께 하마평이 무성할 때 이 당선자는 측근에게 “그 사람들은 아니다”라면서 “여성은 어때?”라고 지나가듯 말했다. 이후 이경숙 카드가 급부상했다.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 거의 내정될 무렵 이재오 의원이 이 당선자의 안가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이 의원은 “국민에게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라며 두 시간 이상 이 당선자를 설득했지만 뜻을 꺾지 못했다.

이 당선자는 뭔가 결정할 때 자기 생각을 툭 던져놓고 반응을 본 뒤, 결정은 혼자 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한번 결심이 서면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측근들은 말한다. 이런 특징이 이번 인사에서 오롯이 드러난 셈이다. 이경숙 카드는 이재오 의원의 우려대로 인선 즉시 논란에 휩싸였지만(21쪽 상자 기사), 이 당선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깜짝쇼'도 없고, 언론 검증도 없고... 

이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은 전임 대통령들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대의 라이벌로 통하는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인사 스타일 면에서도 정반대였다. YS는 마음에 둔 인사라도 언론에 사전 노출되면 취소해버리는 ‘깜짝쇼’를 즐겼다. 아들 김현철씨가 이끄는 비선 사조직이 인사 천거와 검증에 나선 점도 특징이다. 반면 DJ는 언론의 하마평을 중시했다. 측근이나 하마평에 오른 이들은 가급적 언론에 거명되게 하려고 애썼고, 이 때문에 ‘언론 검증’이란 유행어가 등장했다. DJ 정부 시절엔 깜짝쇼 스타일의 인사는 거의 없었다. 청와대나 안기부의 존안자료가 주요 참고 자료로 쓰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두 사람에 비하면 시스템주의자였다. 정권 초반에는 민간 기업의 인사 시스템을 벤치마킹한 다면평가제가 화제였다. ‘국민 참여’라는 이름으로 여론의 천거를 받은 점도 노무현식 인사의 특징이었다. 노 대통령은 사람을 쓰면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다. 최근 언론에서 꼬집은 측근들의 훈장 수여에서 보듯, 물의를 일으킨 측근조차 끝까지 챙겼다.

이명박 당선자는 스타일상 양김보다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좀 더 많다. 자기 판단을 믿으며, 한번 맡기면 주위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당선자는 도덕성이나 정치적 신념, 역사적 평가 같은 가치 기준보다 실무 능력을 최우선으로 친다. 정두언 의원은 “일머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이 당선자는 어떤 분야에 대한 식견뿐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느냐를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뉴시스이명박 당선자가 12월26일 오후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이경숙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현재 이명박 당선자의 측근은 주로 그가 현대그룹 시절과 서울시장, 국회의원 등을 할 때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다. 일로 평가하고 일을 잘하면 다음 일을 또 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당선자 주변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평생을 바친 가신도, 정치적 동지도 없다. 서로 쓰고 쓰이는, 그야말로 ‘용인(用人)’ 관계다. 캠프 분위기는 좋게 말하면 ‘쿨’하고, 이 당선자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실용적이고 실무적이다. 이 당선자가 현대그룹을 떠나서 정치인으로 독립한 지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10년 이상 인연을 맺은 참모가 거의 없다. 반면 김유찬·김경준 등 측근에게 두 차례 배신을 당했다. 한 측근은 “이 당선자에게 배신 콤플렉스가 있어서, 지금도 캠프에서 ‘김유찬보다 더할 놈’이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으로 통한다”라고 말했다.

이경숙 카드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뿐 아니라 측근들의 역학 관계까지 살펴볼 수 있다. 이재오 의원이 끝까지 반대한 반면,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최시중 고문은 “단점만 찾으면 한도 끝도 없다”라면서 이경숙 카드를 적극 옹호했다. 모양새를 보자면 이 당선자가 이재오 의원을 물리치고 이상득 부의장과 최시중 고문의 손을 들어준 꼴이다. 더군다나 그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 사건이 당선자를 둘러싼 측근들의 역학 관계가 드러난 것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연합뉴스역대 대통령과 복심들. 맨 위에서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현철씨
이재오 의원이 ‘물을 먹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이명박 후보가 중요 결정을 내릴 때마다 거치던 최종 테이블이 6인 회의였다. 이 후보 외에 이상득 부의장, 박희태·김덕룡·이재오 의원과 최시중 고문이 멤버였다. 박희태·김덕룡 의원은 한나라당의 원로급 정치인이지만 경선 과정부터 캠프에 참여해서 이 당선자와 인연이 깊지 않다. 이상득 부의장은 친형이며, 동아일보 기자와 한국갤럽 회장을 지낸 최시중 고문은 이상득 부의장의 죽마고우로 이 당선자가 어렸을 때부터 호형호제하며 자란 ‘준가족’ 같은 사이다. 최시중 고문은 ‘이명박의 멘토’ ‘이명박의 그림자’ 등으로 불리는 최측근 조언자이자, 선거 기간 음지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공신이지만 현역 정치인은 아니다. 이재오 의원은 이 당선자와 정치인으로 만났고, ‘정치적 동지’로까지 불렸던 유일한 사람이다.

불려가 야단맞은 최측근 국회의원

이 의원은 한때 이명박의 복심으로 통했다. 이 의원 스스로 “나와 이 후보는 동업자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이 당선자에게 대통령 출마를 처음 권한 이가 이 의원이다. 이 의원은 둘 다 의원이던 시절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들으며 “형님 대통령 하이소. 내가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나이는 이 당선자가 네 살 많다. 대학생 때 6·3 시위에 함께 참여했지만 당시에는 잘 몰랐고, 15대 국회 때 제대로 만났다고 한다. 뜻이 맞는 동지로 15년 이상 손발을 맞춘 셈이다.

ⓒ연합뉴스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지원씨
하지만 선거전 말미부터 이 당선자와 이재오 의원의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관측이 자주 나왔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 당선자에게 이 의원의 존재가 솔직히 부담스러운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 측과 무리한 갈등을 일으킨 점이 부담 요인으로 꼽혔다. 이재오 의원의 정치적 야심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캠프 주변에서 나왔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상 과거 동료 정치인 관계였을 때의 파트너십이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정치적 실세의 설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는 또 있다. 박희태 의원은 대선 직후 몇몇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 특히 관심을 끈 사안이 당·청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언급이었다. 이 말은 박근혜 전 대표 측에서 반발 기미를 보이면서 쟁점이 되는 듯했다. 그러자 이 당선자가 나서서 즉각 우려를 표시했다. 정두언 의원은 나아가 “박희태 의원의 개인 생각이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박희태 의원 스스로 나서서 수습했지만 모양새는 구겼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 일로 당분간 당내 중진 의원들의 목소리가 줄어들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최근 한나라당 내부 인사들에게 이명박 당선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최시중 고문, 정두언 의원이다. 이상득 부의장은 친형이며, 최시중 고문은 현역 의원이 아닐뿐더러 일흔이 넘은 나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현역 의원 중에서 이 당선자와 가장 가까운 이로는 정두언 의원이 첫손에 꼽힌다. 정두언 의원은 최근 수시로 이 당선자를 만난다. 이 당선자의 의중이 그를 통해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정 의원은 스스로 정무적인 판단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노무현 대통령과 안희정씨
하지만 그와 이명박 당선자의 관계는 주군과 가신이나 정치적 동지라기보다는 상사와 부하 직원, 보스와 참모의 관계에 가깝다. 최근 그가 이 당선자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았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 당선자는 정 의원과 박형준 의원을 자주 불러 야단친다. 그만큼 두 사람을 특별히 신뢰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점은 상사와 신뢰하는 참모의 관계일 수는 있지만, 정치적 롤을 부여받고 복심으로 움직이는 정치 동반자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정 의원은 1957년생으로 이 당선자와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과거 정권 때는 통치자의 복심이 가까운 중진 정치인을 통해 발현되곤 했다. YS 시절엔 아들 김현철씨가 실세로 활약했지만, 최형우·김덕룡 의원 같은 가신 그룹이 YS의 대리자로 정치력을 발휘하곤 했다. DJ 정부 시절에는 권노갑 고문과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양김과 측근들은 흔히 주군과 가신으로, 정치적 동지 관계로 묘사되었다.

이명박의 '좌희정 우광재'는 누구?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좌희정 우광재’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나는 이들과 정치적 동업자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안희정씨와 이광재 의원을 신뢰했다. 그러나 젊고 정치 경험이 일천한 이들이 노무현의 복심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컸다. 집권 초반기에는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그 역할을 했지만, 중반에 정무수석 제도를 폐지해버린 뒤부터는 노 대통령의 복심이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집권 후반기 청와대와 정치권의 관계가 경색된 이유를 여기서 찾는 시각도 있다.

주군과 가신이나 정치적 동반자 따위 표현은 어찌 보면 정치 투쟁 시대의 산물이다. 대통령과 측근들은 오랜 정치적 공동 운명체였다. 긍정적인 면도 크지만, 능력보다 친소와 정실에 따라 인사가 좌우되는 부정적인 면 또한 컸다.

전직 대통령과 비교할 때 이명박 당선자의 인력풀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가신도 없고, 동지도 없다. 탈여의도 정치를 지향하는 차기 정부에서 대통령의 메신저는 있어도 복심을 가지고 정치를 조율하는 정치인을 찾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이명박 당선자는 CEO형 정치인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참모는 있지만 정치적 그늘이 될 만한 측근이 없다. 새로운 정치 실험일 수는 있지만,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 한 한나라당 의원의 말이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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