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로 장안의 지가를 올린 바 있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지난 8월말 영국에서 신간을 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선진자본주의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라며 거세게 비판해온 장 교수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처음 내놓은 단행본이다.

이 책,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그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모두 2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그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과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된다. ‘말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작은 정부가 최고’란 명제로,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학’(신고전학파, 정통파)이 지난 30여 년 간 설파해온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장 교수는 이 ‘정통파 경제학’이 현실에서 여지없이 실패했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 것’에서 폭로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장 교수 신간 〈23 Things…〉의 주제는 지난 30여년 간 세계를 풍미해온 ‘자유시장 경제학’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이다.

ⓒ송인호
지난 9월12~16일, 영국 캠브리지에서 이루어진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장 교수는 “자유시장 경제학이 세계금융위기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금융위기를 만든 여러 흐름을 계속 정당화해왔다는 측면에서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금융위기가 이나마 진정된 것도 자유시장 경제학이 아니라 케인스, 민스키, 킨들버그 등 ‘이단적’ 경제학자들의 학설이 정책에 채택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했다.

“사실 자유시장 경제학에 따르면 이번에 리먼 브러더스뿐 아니라 모든 금융기관을 파산시키고 이자율도 높이는 것이 정석이다. 그래야 시장규율이 서고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똑같은 어리석은 짓을 안 하게 된다고 자유시장 경제학이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막상 위기가 터지니까 그런 주장을 계속 하지는 못하고 있다. 말로만 시장주의 하는 거다.”

〈23 Things〉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대목은 1990~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영미 신진보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클린턴과 블레어로 대표되는 ‘신진보주의’에 따르면, 정보통신 등의 기술 발전으로 지구화는 ‘되돌릴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이에 따라 ‘진보’의 새로운 임무는 ‘상품․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 등 서비스 산업 육성’ ‘복지혜택 축소’ 등이라는 것. 다만 ‘진보’의 전통적 이상인 ‘평등’은, 모든 국민에게 고등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는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인터뷰에서 ‘신진보주의’의 저변엔 ‘정보통신 기술에 대한 과대평가’가 존재하며, 이는 ‘제조업 포기론’ 등 그릇된 경제정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기술발전 때문에 ‘상품․자본시장의 무리한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과도한 금융산업 육성’ 등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는 “시민들이 저항하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위한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의 ‘교육 강화론’도 “지식 기반 경제론‘이란 그릇된 신화에서 도출된 대안이며, ‘교육 강화로 생산성이 더 높아졌는가’를 따져보면, “블레어의 교육 정책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보수주의자들과 클린턴․블레어의 ‘신진보주의’가 주창해온 ‘기회의 균등’ 역시 어느 정도 수준의 ‘결과의 균등’으로 담보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블레어 정책은 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강화하는 대신 다른 복지혜택은 줄였다. 어떻게 보면 ‘기회의 균등’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켜 버린 것이다. 복지수당 깎아서 생계가 어려운 상황인데 학생들에게 공부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장하준 교수의 새 책 〈23 Things…〉의 영국판 표지.
최근 국내 일부 진보세력이 주장하고 있는 ‘복지국가 노선’을 장 교수 역시 강력히 제기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그는 “복지국가는 ‘노동자의 파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런 기제가 있어야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경제도 활력 있게 운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파산법이, 어려움에 처한 기업을 채권자들의 채무독촉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보호하면서 ‘재기’를 도와주는 제도라는 점을 빗댄 것이다. 또한 ‘부자에게 몰아주기’를 통한 트리클 다운(적하 효과)이 아니라 ‘복지국가라는 펌프’를 통해 평등과 경제활력의 회복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리클 다운’, 즉 위에서 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펌프를 사용해서 ‘위’의 물을 ‘아래’로 뿜어내야, 사회가 평등해지고 경제 활력도 회복될 수 있다. 이 펌프가 바로 복지국가다.” 장 교수는 신진보주의의 정책 패키지 중 하나인 ‘금융 등 첨단 서비스산업 집중 육성’도 아이슬란드의 사례를 들며 거세게 비판했다.

지난 8월 영국에서 발간된 〈23 Things…〉는 BBC,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옵서버, 뉴스테이츠먼 등 유수한 영국 언론들에 서평과 인터뷰가 게재되면서 현지에서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케인스 전기 3부작으로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뉴스테이츠먼 서평을 통해 “통렬하고 재미있다”고 평가했고, 옵서버 서평자인 존 그레이는 장교수에 대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반자본주의자는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위기를 예방할 수 있을 정도로 개혁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그에게 ‘이단적 경제학자’란 별호를 선사했다.
이 책, 〈23 Things…〉는 영국에 이어 올 가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나오고, 미국 출간은 내년 초에 예정되어 있다. 러시아와 타이완 출판사들과도 계약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한국어판은 10월말에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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