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이 창간과 더불어 ‘신뢰’라는 화두를 던진 지 3년이 지났다. 성장 제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2007년 창간 당시에는 생뚱맞게 들리던 신뢰라는 말이 이제 어느 유력 차기 주자의 입버릇이자, 대통령이 제시한 ‘공정한 사회’와도 맥이 닿는 시대의 화두로 격이 올랐다.

신뢰는 ‘착하게 살자’는 도덕 교과서 말씀만은 아니다. 신뢰가 있는 사회에서는 감시와 통제 비용이 줄고 유대가 강화되어 사회적 생산성이 오른다. 그래서 신뢰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만이 결국 번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돌았다. ‘묻지 마 성장주의’ 전략이 한계에 부딪힌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졌다. 신뢰가 화두로 떠오른 시대. 〈시사IN〉이 창간 3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신뢰도를 측정해봤다.

2007년, 2009년에 이어 세 번째로 실시한 이번 신뢰도 조사에서도 〈시사IN〉과 미디어리서치는 차기 대선주자군의 신뢰도와 불신도를 물었다. 2007년 대선 전에 실시한 첫 번째 조사 때는 이명박 예비후보가 신뢰도와 불신도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해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신뢰도 34.9%, 불신도 14.2%). MB 정부가 들어선 후인 2009년 조사에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압도적으로 높은 신뢰도(38%)와 낮은 불신도(6.5%)를 기록해 강력한 선두 주자의 위용을 뽐냈다. 이번에는 어떨까.

“신뢰도는 선행지수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여론조사를 다뤄온 한 참모는 이렇게 말했다. 신뢰를 받기 시작하면 지지율은 따라 올라가고,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미디어리서치 하동균 수석연구원은 “신뢰도와 지지율 사이에 정확한 인과관계가 어떤지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신뢰도 추이는 지지율 추이와 나란히 가는 모습을 나타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장 예상되는 것은 ‘박근혜의 퇴조’다. 〈시사IN〉 제155호에서 분석했듯, 박 전 대표는 올해 1월 ‘세종시 전면전’을 기점으로 지속적인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40%대를 유지하던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지난 5월 이후로 좀처럼 2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세종시 논란’ 과정에서 ‘신뢰 브랜드’를 내세웠지만, 충청권에서조차 신뢰도 하락을 겪었다.

반대 논리도 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정국 당시 보수층의 이탈을 각오하면서도 전면에 내세운 핵심 키워드가 ‘신뢰’였다. 17대 국회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합의한 약속을 깨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한나라당 친박계에서는 “당장 지지율을 잃었을지언정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가 아니다”라고 평가하곤 했다.

그렇다면 과연 여론은 친박계의 바람대로 ‘박근혜=신뢰’라는 공식을 받아들이고 있을까.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도 박 전 대표는 ‘신뢰받는 지도자’ 이미지를 얻어냈을까. 두 가지 상반된 근거가 부딪치면서, 박 전 대표의 신뢰도 추이는 이번 조사에서 가장 관심을 산 대목 가운데 하나였다.

결과는 박 전 대표의 지지율 추이와 놀랄 만큼 비슷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응답자의 38%가 대선주자 중 박 전 대표를 가장 신뢰한다고 답한 반면, 이번 조사에서는 28.9%만이 박 전 대표를 첫손에 꼽았다. 9.1% 포인트가 빠졌다. 지난 8월30일부터 9월3일 사이에 리얼미터가 조사한 차기 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박 전 대표 지지율은 26.9%로 나타난 바 있다. 지지율 추이와 신뢰도 추이가 얼추 같이 간다는 의미다.

지지율이 빠진 층과 신뢰도가 빠진 층도 겹친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한나라당 지지층의 이탈은 이번 신뢰도 조사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지난해에는 한나라당 지지자의 53%가 박 전 대표를 가장 신뢰한다고 답한 반면, 이번 조사에서는 39.8%에 그쳤다. 대신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서 두 자릿수 신뢰도를 얻었다(각각 11.6%, 11%). 친이계 대선주자군으로 분류되는 두 사람은 전체 조사에서도 ‘박근혜 퇴조’의 반사효과를 누린 듯 지난해 조사 결과보다 신뢰도가 각각 5.4% 포인트와 3% 포인트 올랐다.

이 외에도 박 전 대표는 연령으로 20대와 30대, 지역으로 수도권, 직업으로 자영업·화이트칼라·학생 층에서 신뢰도 하락을 겪었다. 기존 지지층의 이탈을 각오하면서도 세종시 원안을 관철시켰지만, 충청권에서조차 신뢰도가 하락한 것은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다. 2009년 조사에서 충청권 응답자의 44.3%가 박 전 대표를 가장 신뢰한다고 답했는데, 이 수치는 이번 조사에서 37.4%로 떨어졌다. 신뢰도 추이가 지지율 추이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박 전 대표가 그토록 되풀이해 강조한 ‘신뢰의 박근혜’라는 브랜드가 거의 각인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세종시 정국을 거치며 친박계가 걸었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결과다.

지난해 조사에서 2위를 차지하고 각종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도 2위권을 형성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번 조사에서도 2위를 지켰다. 지난해에 견주어 오차범위 내인 1.1%가 올라 9.3%를 기록했다. 하지만 ‘뒷걸음질 친 박근혜’와 비교해보면 여전히 차이가 크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층만 따로 놓고 봐도 신뢰하는 정치인으로 박 전 대표를 꼽은 응답자가 유시민 전 장관을 꼽은 응답자보다 근소하게 더 많을 정도다(박근혜 21.2%, 유시민 20.6%).

불신하는 정치인, 정동영 2년 연속 1위

지난해 조사에 이어 올해도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가장 불신하는 정치인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전체 응답자의 7%가 정 의원을 꼽았다. 비록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2년 연속 ‘가장 거부층이 두꺼운 정치인’으로 꼽힌 것은 부담스러운 결과다. 민주당 지지층조차 5.2%가 정 의원을 가장 불신한다고 답했다. ‘열성 팬과 극렬한 안티를 동시에 몰고 다니는’ 유시민 전 장관은 신뢰도에 이어 불신도에서도 2위(5.4%)를 차지했다. 팬과 안티가 모두 공고하다는 사실은, 유 전 장관이 지난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로도 꼽히는 고질적인 약점이지만 좀처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4.8%로 불신도 3위에 오르며 ‘데뷔’했다. 지난 7월 당 대표 취임 이후 나름 인지도가 오른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대표는 신뢰도 조사에서는 고작 0.7%를 얻은 바 있다. 인지도 상승분이 고스란히 거부층으로 흡수되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정몽준 전 대표가 4.6%로 불신도 4위. 정 전 대표 역시 신뢰도 조사에서 2.5%로 9위에 그친 걸 보면 한나라당 대표 자리가 마냥 ‘남는 장사’만은 아닌 셈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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