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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은 ‘최인훈(위) 이어쓰기’로 단연 화제가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최근의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부터 〈댄스 댄스 댄스〉(1988)까지 초기 작품들이 일본 사회에 대한 반감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다. 고등학교 때 교복 폐지를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압도적 다수의 학생이 교복을 입는 쪽을 선택하더라는 것. 또 20대 때 어느 신문에서 자유·우애·평등 따위의 가치들 중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결과에서도 의외로 자유는 7, 8위에 그쳤다는 것 등이 그가 ‘반감’과 관련해 떠올리는 에피소드다.

“젊은 시절의 그 두 가지 체험을 통해 일본인이 자유에 비중을 크게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자유와 개인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는 나름 소설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들, 살균된 듯 너무 정갈해

적어도 이 점에서는 1970년대 일본과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식민지·분단·군사독재·신자유주의를 차례로 경험한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주도적 멘털리티는 언제나 ‘집단주의’였다고 해야 옳다. 수년 전에 출간된 배수아의 〈독학자〉(2004)는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의 사례였다. 이 소설은 1987년 대학 사회를 배경으로, 가장 진보적이라 자임한 운동권들조차 자유와 개인이라는 가치에 얼마나 둔감했는지를 격렬하게 논증한다. 내외부 ‘집단’의 탄압에 또 다른 ‘집단’의 대동단결로 맞서오면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쳤다.   

고종석의 새 소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왜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지 의아해할 독자는 별로 없으리라. 그리고 그가 오랜만에 발표한 새 소설이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 자유주의자로 간주되는 최인훈에게 헌정된 것도 뜻밖의 일은 아니다.

그의 ‘최인훈 이어쓰기’가 단연 화제가 되었지만, 나는 그것과 거리를 두고 〈독고준〉을 독자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읽어보려 했다. 최인훈이라는 이름 때문에 후광을 둘러서도 안 되겠지만, 최인훈의 전작과 대조되어 과도하게 박한 평가를 받아서도 곤란하겠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훌륭한 ‘글’이되 얼마간 아쉬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독고준의 유고 일기를 그의 딸 독고원이 읽어나가면서 논평하는 형식으로 짜였다. 독고준의 목소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종석의 그것과 거의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독고원의 목소리 또한 그들과 아주 가끔만 구별된다. 이런 식이니 여기에는 흔히 소설의 뼈대라고 간주되는 ‘캐릭터’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일반 독자들로부터 ‘이게 무슨 소설이냐’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모양새이고, 문예이론가 바흐친 식으로 말하면 ‘단성(單聲)적 소설’에 가깝다. 그의 아름다운 문장들도 살균된 것처럼 너무 정갈해서 파토스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단성적 소설 운운했지만, 이 말이 소설로서의 결함을 지적한 것이기는 하되 고종석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고 그의 문장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단성’의 매력만으로도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될 것이다. 아니, 누구라도 끝까지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적자. ‘수꼴’과 ‘좌빨’ 운운의 경박한 언사들 속에서 우리는 개인과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그 끝 간 데까지 사유해본 적이 없다. 그 가치를, 오른쪽 끝에 있는 이들은 불온하게 여기고 왼쪽 끝에 있는 이들은 손쉽게 극복해버린다. 회색이 도달점인 사회는 불완전하지만, 회색이 출발점이 아닌 사회는 불행할 것이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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