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의 사전(辭典)적 의미는 ‘여러 가지 사항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고 그 각각에 해설을 붙인 책’이다. 참 재미없다. 잡다한 지식을 아무 줄거리 없이 설명만 하다 끝나는 책이라는 말 아닌가. 많은 사람에게 사전에 대한 기억은 ‘무겁고 비싸기만 한 책’이거나 ‘(자녀 방 책장에 꽂아두기 위해) 반값 처분 행사를 할 때만 살까 말까 고민하는 책’ 정도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전의 뜻풀이 말 중 ‘여러 가지’라는 부분을 잊으면 안 된다. 그 말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요즘 사전들은 기존 백과사전처럼 단순히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속에 욱여넣는 방식을 탈피했다. 대신 나무, 좌파와 우파, 영어 이름, 문학, 여성과 관련된 속담 등 ‘여러 가지’ 주제 중 하나를 역사학·인문학·여성학·개념학 등 ‘여러 가지’ 분석틀 가운데 하나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사전은 필요할 때마다 들춰보고 이내 덮는 책이 아니라, 진득이 손에 들고 몇 시간이고 ‘독서’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사전의 진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난 8월 출간된 〈좌우파 사전〉(구갑우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이다. 한국의 사회과학계 중진 학자 14명이 개념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모순이 일어나고 있는 단어들을 골라 이를 좌파와 우파 시각으로 해석했다. 사실 이 책은 ‘사전’이라는 안온한 이름이 붙기에 적절치 않은지도 모른다. 제목에 붙은 ‘좌우파’는 “한국에서 그 자체로 피 냄새가 나는”(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 단어이고 국민주권·법치주의·애국·인권·한미 동맹·신자유주의·고교 평준화와 같은 표제어 22개는 “한국 사회에서 하나같이 화염성이 강한 쟁점들”(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기 때문이다.
 

ⓒ시사IN 백승기

‘사전’ 형식이 공정성을 지켜주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좌우파 사전〉은 더욱더 ‘사전’이라는 이름을 달아야 했다. 책의 공동 저자이자 기획자이기도 한 조형근 서울대 HK연구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특정한 노선에 대한 지지 이전에, 한국 사회 정치 담론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일종의 ‘기초 연구’를 해보자는 문제의식으로 애초부터 책의 포맷을 사전으로 잡았다”라고 말했다. 조 교수 말에 따르면 저자들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서술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이건 (일반 단행본이 아닌) 사전입니다”라는 조언을 던진 덕에 책이 공정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단다.

〈좌우파 사전〉이 한국 좌파와 우파가 보는 사회과학적 개념의 차이를 고찰했다면, 한림과학원이 기획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선애 외 옮김, 푸른역사 펴냄)은 문명·문화·진보·제국주의·전쟁·평화처럼 “정치·사회적인 의미 연관들로 꽉 차 있어서, 사용하면서도 계속해서 다의적으로 머무르는 단어(코젤렉)”들의 통시적 의미 변화를 짚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도 그 의미를 놓고 자주 논쟁이 벌어지는 단어 ‘진보(進步)’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전진’ ‘진행’ ‘경과’ 등 기술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을 판단하는 것에서 19세기 이후 시민들의 정치사회적 욕구를 반영하는 정치적 표어와 당파적 개념으로 그 쓰임새가 확연히 달라졌다. 말의 순수한 의미보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 변화가 궁금한 이들에게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은 풍부한 관련 지식을 제공한다.

사회과학뿐 아니라 문화 분야에서도 다양한 사전이 나와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지난 2008년 12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근대문학 100주년을 맞아 엮은 〈100년의 문학용어 사전〉(도서출판 아시아 펴냄)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한국 근현대 문학계에서 사용된 용어의 ‘개념’뿐 아니라 그간 나타난 문학 ‘현상’까지 정리했다. 그래서 ‘묘사’ ‘아이러니’ ‘카프 문학’과 같은 정통 문학 용어는 물론이고, 출판과 문화 일반의 용어(초판, 문화 콘텐츠), 북한 문학 용어(벽소설, 수령 형상 용어), 정보화·민주화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문학 용어(e북, 팬픽, 1인 미디어)의 의미와 의의까지 책에 담겼다.

외국 문화를 소개하는 사전들도 눈길을 끈다. 한국의 일본 연구자 130명이 집필한 〈일본문화사전〉(고려대 일본연구센터 엮음, 도서출판 문 펴냄)은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역사·교육·예술·대중문화·스포츠·사회복지·종교·철학·윤리·의학 등 일본인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 정리했다. 〈서양문화지식 사전〉(이재호 지음, 현암사 펴냄)은 서양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전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고사성어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나봇의 포도원’이니 ‘통나무 왕’ 같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경에서 따온 서양 고전의 관용적 표현을 모르는 게 당연한 일. 영문학자인 저자는 그런 난관을 겪는 연구자들을 위해 서양 고전 관용구 2300여 개의 해설을 실었다.

영어권 국가에 머무를 때는 물론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닐 때도 영어 이름 하나쯤은 지어야 하는 오늘날, 영어 이름에 얽힌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읽어주는 〈글로벌 시대의 영어이름 사전〉(린다 로젠크랜츠 외 지음, 이현정 외 옮김, 동아시아 펴냄)도 흥미롭다. 책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6000여 개의 남녀 이름 가운데 평범한 이름과 독특한 이름, 웬만하면 피해야 할 이름들을 가려준다. ‘나나(Nana)’가 고대 ‘꽃의 여신’을 뜻한 멋진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피터팬〉에 나오는 아기 돌보는 개와 할머니를 가리키는 명칭으로만 쓰인다는 사실을 한국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홍길동’이나 ‘만득이’처럼, 해당 언어 사용자가 아니면 그게 얼마나 우스운지 알 수 없는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사전이다.

〈글로벌 시대의 영어이름 사전〉처럼 좁은 분야를 고유의 방식으로 파고드는 것은 최근 출간된 사전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나무 사전〉(강판권 지음, 글항아리 펴냄)은 소나무와 잣나무·전나무·등나무 등 217종의 나무를 식물학적 관점 대신 인문학·역사학적 관점으로 기록했다. 〈세계 여성 속담 사전〉(미네케 스히퍼 지음, 한창호 옮김, 북스코프 펴냄)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여성과 관련된 150개국 1만6000여 개 속담을 분석해 ‘여성 억압의 역사’를 짚어냈다. 사전이 제공하는 지식은 이제 다양하고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깊고 독특해지기까지 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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