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1일 오후 7시. 서울 경복궁역 인근 한국건강연대 강당에서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시민정치포럼’(시민정치포럼) 창립총회가 열렸다. 시민정치포럼 발족은 ‘복지국가 제안대회’ ‘건강보험 하나로’ 등 올해 들어 복지문제를 잇따라 본격적인 사회·정치 이슈로 승격시킨 일관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날 시민정치포럼 공동대표로는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이병천(강원대) 교수, 신필균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이 선출되었다. 운영위원장은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주 대표는 1970년대 이후 급진적 노동운동 및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을 주도해온 국내 진보운동의 지도자로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위 의장을 역임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탈당한 뒤 사회민주주의 및 복지국가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에게 향후 시민정치포럼이 복지국가 운동에서 어떤 구실을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시사IN 조남진시민정치포럼의 주대환 운영위원장은 이제 수만 대중과 함께하는 ‘복지국가운동본부’로 포럼을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시민정치포럼’이라니, 시민단체 같기도 하고 정치단체 같기도 하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정책 생산’을 해왔다면 시민정치포럼은 대중운동을 해나갈 것이다. 이른바 뉴라이트운동이 잘나갈 때 ‘자유주의연대’와 ‘한반도선진화재단’이 담론 및 정책을 생산했다면, 김진홍 목사의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대중운동을 맡았다. 그 결과, 지난 대선에서 뉴라이트는 승리를 거뒀다. 시민정치포럼의 역할은 결국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대중운동이다. 예컨대, 어떤 활동이 가능한가. 복지국가를 공부하고 토론하며 자율적으로 모이는 분이 전국 각지에 많다. ‘제주희망정치’ 같은 모임이 대표적이다. 이런 분들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현재의 움직임이 더 큰 움직임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지금까지 복지국가 운동의 일환으로 ‘진보 대통합’이 시도되어왔다. 민노당·참여당·진보신당·창조한국당 간의 연대 내지 통합은 엄밀히 말해서 그들의 일이다. 민주당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스스로 ‘야권 재편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들이 알아서 연대든 통합이든 할 거다. 복지국가 운동가들이 그들의 거래를 주선하는 거간꾼이나 연락병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일’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예컨대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그 자체만으로 중요한 사건이 될 수는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통합하고 연대하느냐’이다. ‘우리의 일’은 이 ‘무엇’을 시민들과 더불어 만들어내고 선전하고 확산시키는 거다. 그리고 진보가 이 ‘무엇’을 위해 기득권과 고집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시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예컨대, 이제 진보는 자기네만 아는 고상하고 어려운 도덕적 원칙에 대해 수준 높은 말씀이나 주고받는 자들이 아니란 것을 보여줘야 한다. 골방에 모여 진보의 개념과 범위, ‘어떤 놈들이 진보가 아닌지’의 기준이나 벼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려야 한다. 진보는 이제 시민 생활의 아픔과 정서, 희망을 생생히 이해하고 구체적 대안을 내놓는 집단으로 각인되어야 한다. 시민정치포럼은 지금 겸손하게 ‘포럼’으로 이름 붙이고 출발하지만 이후 수만 대중과 함께 할 때는 ‘복지국가운동본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 성향 정당들의 통합은 이제 필요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진보 정당들의 연대와 통합을 갈망한다. 그러나 통합만이 문제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민주당에 들어가면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결국 문제는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때때로 진보적 주장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지역 기반과 대북 정책을 빼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정말’ 정권을 교체하고 싶다면 ‘정말 다른’ 야당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야 4당이 통합해서 전체 판을 흔들고, 이에 따라 민주당을 심각하게 압박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범야권의 구도가 바뀌고, 적어도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고 ‘역동적 복지국가’를 국가 비전으로 하는 중도진보 야당이 나타나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정권 교체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더라. 결국 무엇을 위해 뭉칠 것이냐는 대의명분, 공동의 목표를 우뚝 세우는 것이 야권 재편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라고 본다.

야 4당 때문에 속상한 일이 꽤 많았나보다. 아니다. 야 4당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더 길게 보는 역사적 안목이 절실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시민정치포럼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통합 협상에 끼어들기보다, 진보진영 모든 정당들이 앞으로 공통적으로 내걸어야 할 대의, 국가 비전과 정책 다발을 시민의 일상생활 속에 퍼트리고, 시민 누구나 소속 정당을 넘어서서 함께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 비전이 ‘역동적 복지국가’인가. 많은 사람이 그 용어를 어려워한다. 우리는 복지정책 몇 개를 실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회경제 체제로서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현존하는 국가 중에서는 북유럽 모델과 가장 비슷하지만, 한국의 현실적 조건과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로 귀결될 것이다. 사실 ‘역동적’이란 부분이 이해 안 된다고 하기에 ‘활기 넘치는 복지국가’로 표현을 바꿔볼까 고민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역동적 복지국가’란 ‘보편적 복지’와 ‘사회·경제적 활력’을 겸비한 나라를 만들자는 거다. 지난 10여 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높은 편이었다지만, 나라의 활력이 크게 시들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것 같다. 이를 되살려내는 게 역동적 복지국가의 역할 중 하나다.

그렇지만 유럽 복지국가들이 미국 같은 ‘시장국가’보다 활력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나라에서 기본생활을 보장하니 활발히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할까. 시장주의자들은 유럽 복지국가들의 경우 소수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는 나라 돈이나 받으며 빈둥거린다고 주장한다. 이런 나라에는 활력도 없고 복지병이 판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이 자기 실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노력하는 사회다. 이런 개인들은 공정한 경쟁에 참여해서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가를 얻는다. 그동안 한국은 전 국민이 (어느 정도까지는 공정성이 보장되는) 경쟁 시스템으로 나름의 활력을 누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갈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고, 계급이 고착되면서 공정한 경쟁 기회가 오히려 극도로 제한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를 복지국가 노선으로 교정해야 한다.

진보 쪽 사람에게서 ‘경쟁’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듣기는 꽤 오랜만이다. 경쟁과 시장 없이 우리 사회의 존속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편이며, 스스로 (일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의식도 매우 강했다. 이게 한국의 생활 방식이자 국민 정서이다.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을 기르며 경쟁에 참여해왔다. 문제는 이런 경쟁의 공정성이 계속 악화하고 있다는 거다. 가정환경에 따라 아이들의 경쟁 조건이 너무 차이 나고, 한번 패배하면 재기할 수 없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게 문제이지, 경쟁 자체를 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뉴시스진보 세력 일각에서는 복지국가 운동이 “박근혜 좋은 일 시킨다”라며 냉소하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복지’를 ‘개량’으로 간주해오지 않았나. 최근에는 ‘복지를 강조해봤자 박근혜 좋은 일만 시킨다’라는 반응도 있다. 글쎄다. 박근혜 의원에 대해서는 그의 지론인 ‘줄푸세’ 노선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기)와 복지는 아무래도 함께 가기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문제를 따지기에 앞서, 보수 세력의 일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복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들어 복지문제가 전면 제기되면서 보수 세력은 한동안 매우 당황하고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일부가 방향을 바꿨다. 이는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변화이고, 진보 세력의 무상급식과 ‘건강보험 하나로’ 등은 이미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 대다수에게 이익이 되는데, 보수에게 이익이 될까봐 안 된다는 논리는 진보의 것이 아니다. 물론 보수 본연의 입장과 철학에서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 세력이 당파적 이익에 매몰되어 ‘박근혜 좋은 일 시킨다’는 식으로 여기면 안 된다. 국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더 좋은 정책을 만들려고 해야 진보가 이긴다. 그리고 보수가 아주 좋은 복지정책을 만들어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한 거다. 이른바 진보 세력의 일원들이 이상한 걱정일랑 그만뒀으면 좋겠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Tag
#복지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