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
비평가란 본래 과장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경천동지할 걸작’ 혹은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표현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최상급 형용사들과 싸워야 한다. 카드를 다 써버리면 나중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못 참겠다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비평가 아무개 씨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일러 ‘가장 완벽한 단편’ 운운하는 걸 보고, 또 한 비평가가 백기를 들었구나,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제야 ‘대성당’을 찾아 읽었다. 뭐랄까, 완벽한 단편이었다. 

10년 전에 소개된 바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이 최근에 새 번역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카버는 1938년생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치코 캠퍼스에서 존 가드너에게 소설을 배웠고 22세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38세에 첫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1976)를 출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으로 자리를 굳혔다. 세 번째 단편집 〈대성당〉(1983)이 대표작이다. 이 책으로 그는 ‘아메리칸 체호프’라는 칭호를 얻었다. 체호프의 아류라는 뜻이 아니라 체호프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놀랍게도 레이먼드 카버는 처음부터 진짜 오리지널 레이먼드 카버였다”.

 〈대성당〉에는 표제작 ‘대성당’을 포함해 단편이 총 12편 수록되어 있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작품이지만, 그 중 한 편만 읽어야 한다면 역시 ‘대성당’일 수밖에 없다. 작품 속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맹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아내는 이름이 로버트인 그 맹인 친구가 곧 그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맹인이라니, 내가 아는 맹인이라고는 영화에서 본 사람들뿐이다. 아내는 오래된 친구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나는 모든 게 그저 귀찮고 불편하기만 하다. 저녁 식사를 마쳤고, 아내는 잠이 들고, 마침내 로버트와 단둘이 남았다. 어찌해야 하나.

‘아메리칸 체호프’ 칭호 안겨준 대표작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레이먼드 카버.
나는 하릴없이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린다. 어떤 채널에서 세계 각지의 성당을 소개하고 있다. 대성당이라.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로버트에게 묻는다. 맹인은 잘 알지 못하니 설명해달라고 청한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려나, 비로소 나와 로버트의 진지한 대화가 시작된다. 로버트는 한술 더 떠서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말한다. 둘은 손을 포개어 잡고 펜을 든다. 그리고 이제 소설은 당신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 소설은 편견과 소통에 대해 말한다. 부정적인 견해만 편견인 것은 아니다. 내가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앎, 한 번도 반성해보지 않은 앎은 모두 편견일 수 있다. 이를테면 맹인이 아닌 자가 맹인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란 것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편견의 테두리 밖에 있기 어렵다. 그 편견은 어떻게 깨어지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많다. 그러나 편견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힘 있게 그려낸 소설은 많지 않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저 자신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써본 바 없으면서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가장 좋은 것은 쓰지 않는 것이다.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일본에서 카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한국어판 〈대성당〉을 번역한 사람은 소설가 김연수다. 김연수는 누구인가. 이를테면, 1~2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다. 하루키와 김연수라니, 어쩐지 공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국가 경쟁력이랄까, 뭐 그런 차원에서 말이다. 이제는 하루키의 문장으로 카버를 읽는 일본 독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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