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특징은 철학적·추상적 영역에서 신뢰가 무너져 있는 것이라고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는 진단한다. ‘정치인=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일반의 의식구조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교육자·종교인·법조인 또한 다를 바 없다. 이들보다 오히려 기업인이 신뢰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거대 담론이나 가치를 추구하는 데 관한 신뢰보다, 기능적·구체적 성과에 대한 신뢰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학)의 지적대로 한국 사회가 빠르게 ‘기업 사회’가 되어가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언론인 손석희씨(성신여대 교수·언론학)가 받는 신뢰는 이례적인 측면이 있다. 손씨는 우리 사회에서 말로써 신뢰받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이번 조사에서 손석희씨는 일반인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22.0%)으로 꼽혔다. 엄기영 MBC 〈뉴스데스크〉 앵커(10.0%), 홍기섭 KBS1 〈뉴스9〉 앵커(4.5%), 김주하 MBC 〈뉴스데스크〉 주말 앵커(1.7%), 정관용 시사평론가(1.6%),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1.2%)이 뒤를 이었다.

이 중 2~4위를 차지한 엄기영·홍기섭·김주하 씨는 모두 거대 방송사의 간판격인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진행하는 KBS 〈뉴스9〉(21.8%)와 MBC 〈뉴스데스크〉(14.7%)는 이번 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방송 프로그램 1, 2위로 꼽히기도 했다.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진행자에 대한 신뢰로 일정 부분 전이되었다는 유추가 가능한 대목이다.

공정한 ‘까칠함’이 손석희의 무기

이는 손석희씨에게도 해당한다. 이번 조사에서 손씨가 진행하는 MBC 〈100분 토론〉 (9.5%)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1.3%)은 가장 신뢰하는 방송 프로그램 3위와 10위에 올랐다. 10위권 이내에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2개 이상 오른 언론인은 손씨가 유일하다. 또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텔레비전이 아닌 라디오 프로그램으로서는 유일하게 10위권 이내에 진입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는 손석희씨의 이러한 ‘괴력’이 ‘절제된 쿨(cool)함’에서 비롯했다고 분석했다(〈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 에너지〉, 인물과사상사). 여기서 쿨하다는 것은 일반에서 쓰는 의미와는 약간 다르다. 겉으로 차분하고 냉정한 듯 보이면서, 내면에 일탈과 반항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방송 진행 중 이따금 터져나오는 손씨의 이같은 일탈과 반항의 에너지는 ‘진행이 과도하게 공격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지난 4월 ‘조승희 사건’을 두고 이태식 주미대사와 벌인 설전이 대표적 사례였다. 이 사건으로 손씨는 네티즌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았다. MBC 내부에서도 노골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손씨와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스태프는 손석희씨의 이같은 공격적 스타일 때문에 출연자 섭외에 애를 먹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나마 정치인들은 손씨의 공세에 시달릴 것을 각오하면서도 ‘세간에 자기 이름이 오르내리는 효과’를 기대하며 섭외에 응하는 편이다. 그러나 정부 관료는 요지부동이다. 특히 조직 분위기가 보수적인 한 정부 부처는 고위 관료들이 한결같이 〈시선집중〉 출연을 기피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 왼쪽부터 손석희 교수 엄기영 앵커 홍기섭 앵커.
그 상황에서도 손씨의 강점을 꼽으라면, 출연자 모두에게 이런 ‘까칠함’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는 점이다. 〈시선집중〉에 출연했다가 그의 공격적인 질문에 당황한 경험이 있다는 한 시민단체의 국장급 간부는 “평소의 개혁적 이미지 때문에 손씨가 시민단체에 우호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방송 진행자로서 손씨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손씨에 대한 신뢰가 언제까지, 어느 수준으로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MBC의 한 PD는, 손씨가 현재 누리는 인기는 과대 포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손석희씨의 경우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원칙에 충실한 언론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 성숙시켜야 할 부분 또한 많은 언론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손씨가 포용적인 시각을 기르고 경제 분야 등 취약한 콘텐츠를 채워갈 때 신뢰가 더 공고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뢰할 만한 언론인과 더불어 신뢰할 만한 방송 프로그램을 알아본 이번 조사에서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것은 정통 시사 프로그램과 토론 프로그램의 선전이었다. 조사 결과 신뢰도 10위권 이내에 진입한 시사 프로그램은 MBC 〈PD 수첩〉(4.5%), MBC 〈시사매거진 2580〉(2.0%), KBS2 〈추적 60분〉(1.5%), 토론 프로그램은 MBC 〈100분 토론〉(9.5%), KBS1 〈생방송 심야토론〉(1.5%)이었다. 〈이영돈 PD의 소비자 고발〉(1.2%) 또한 신뢰하는 프로그램 12위에 올랐다. 낮은 시청률 때문에 개편 때마다 존폐 위기에 몰리곤 하지만 공영 방송으로서의 신뢰를 보증하는 데에는 역시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적자임을 이번 조사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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