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일이다. 내가 참여하고 있던 문화 NGO인 문화연대에서 대중음악 개혁을 위해 당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을 선언하고 국회 공청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가요순위 프로그램,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 하는 다소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주제로 연 공청회에 모인 청중 수백명 중 다수는 서태지 팬덤이었다. 공청회 며칠 전 이 운동에 공감한다며 집단 참여를 공언한 서태지 팬덤은 그해 국회 공청회 역사상 최다 관중을 동원하고 말았다. 공청회 후에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뿐 아니라 대중음악 전반을 개혁하자는 취지로 ‘대중음악 개혁을 위한 연대모임’(대개련)을 결성했고, 이 모임에 서태지 팬덤뿐 아니라 이승환 팬덤, 블랙홀 팬덤, 조용필 팬덤, 그리고 후에 god 팬덤도 결합했다.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정기 모임에서 활기찬 토론회를 열기도 했고, 실제 순위 프로그램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모니터링을 실시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을 위한 서명운동도 했고, KBS에 항의하기 위해 사이버 시위를 벌여 홈페이지를 한때 다운시키기도 했다. 지속적인 캠페인 운동 결과 KBS가 먼저 순위 프로그램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고 이후 약간 시차를 두고 SBS, MBC가 순위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아마도 이 운동이 방송사를 상대로 싸워서 이긴 최초의 팬덤 연합 운동이지 않을까 싶다.

서태지와 아이들 팬

이후 대개련은 당시 유명 아이돌 그룹들을 무작위로 출연시켰던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방위 모니터링과 프로그램 축소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서태지·이승환씨와 관련된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왜곡된 보도에 맞서 팬덤 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당시 주 2회 방영되던 〈한밤의 TV연예〉가 1회로 축소되었다. 이 밖에 2001년 god의 콘서트가 잠실올림픽경기장으로 변경된 것에 항의하는 god 팬덤의 콘서트 보이콧과 서태지 팬덤의 한국저작권협회 개혁운동에 다른 팬덤도 함께 연대하기도 했다.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위해 서태지 팬이었던 한 여고생이 혼자서 일주일 만에 700명 서명자를 받아온 것을 보고, god 팬덤이 콘서트 보이콧을 위해 일주일 동안 7000만원이 넘게 모금하는 것을 보고, 21세기 가장 열정적인 운동단체는 민주노총도 아니고 참여연대도 아니고 바로 팬덤 연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 연예오락 프로그램 폐지운동 이후 2002년에는 라이브공연 활성화 캠페인을 벌여 팬들 스스로 한국 공연문화 환경 실태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문화연대와 함께 〈올 댓 라이브(All That Live)〉 공연을 통해 공연부가세 폐지운동도 펼쳤다. 팬덤 연합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문화운동은 2002년 연예계 PR비 사건을 터뜨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개련은 연말 가요시상식 폐지운동이나 저작권협회 저작권 징수체제 개혁운동 등을 전개하다가 2003년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해산되고 말았다.

대략 3년 동안 펼친 팬덤의 문화운동은 아마도 전 세계 팬덤 문화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을 것이다. 팬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대중문화 개혁을 위해 장기간 연대활동을 펼친 것은 이념과 창작 혹은 정책에 기반을 둔 기존 문화운동의 방식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특정한 문화적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들의 행동은 다른 일반 NGO 운동가 못지않게 열정적이었고, 활동 몰입도와 진정성의 강도는 오히려 어떤 운동 단체보다 강했다. 물론 한국의 팬덤 문화도 일각에서는 대단히 배타적이고, 스타에 대한 반응에서 편집증적인 경향이 있지만, 자신들이 팬덤 문화의 주체이면서 당당한 문화 권리를 가진 집단이라는 자의식도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난다.

ⓒ뉴시스이승환 팬

동방신기·박재범 계기로 팬덤 문화운동 부활

팬덤 문화운동을 오랫동안 함께 기획했던 나로서는 요즘 만감이 교차된다. 가요순위 프로그램과 연말 가요시상식이 폐지되면, 한국 대중음악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2000년대 초 팬덤과 함께했던 희망들은 지금 여지없이 분해되고 말았다. 아이돌을 포함해 뮤지션들은 과거보다 더 많이 방송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며 육체노동뿐 아니라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순위 프로그램은 과거보다 더 독점화·획일화되었다. 이제는 새로 부활한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독점 현상과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선정성을 언급하는 것조차 촌스러울 정도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팬덤도 과거 선배들처럼 대중문화의 직접적인 행동 주체로 나서는 것을 꺼린다. 온라인에서 익명의 팬덤 연합은 더욱 막강해졌지만, 사사로움을 떠나 공익을 위한 문화행동은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난 7월에 문화연대가 개최한 ‘팬덤 수다회’에 참여한 많은 팬들의 감각도 분명 과거와는 달랐다. ‘팬질’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의 정서적 간극도 분명했다. 이들에게 “너희들은 왜 선배들처럼 행동하지 않니?”라고 말하는 방식도 운동의 정당성을 가장한 팬질 안 하는 먹물들의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그렇다면 팬덤 문화운동은 이제 더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오히려 과거처럼 무엇을 당장 개혁하겠다는 식의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언어가 아닌 좀 더 세련되고 자율적인 운동의 가능성은 더 크다. 지난번 촛불시위, 동방신기 해체 및 불공정 계약 사태, 박재범 탈퇴 및 복귀 사태에 대응하는 팬덤의 잠재력을 확인한 바 있다. 팬덤이 대중문화 소비 과정에서 당하게 되는 억울한 사례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가 당할지도 모르는 인권 침해와 부당한 계약관행과 같은 더 큰 문제들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갈 팬덤의 자발적인 연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뉴시스조용필 팬
기자명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