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일본 검찰을 참고할 만하다. 이건희 회장은 검찰을 잘 관리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일본 대기업은 도쿄 지검 검사장의 애첩까지 관리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으나, 그는 권력형 비리 사건을 전담하는 도쿄 지검 특수부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도쿄 지검 특수부는 고바야시 요시로 검사장이 1909년 대일본제당의 국회의원 수뢰 사건을 수사하면서 확실한 ‘경제 검찰’의 자세를 확립했다. 이때만 해도 메이지 유신의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검찰이 감히 정치인을 수사·체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주위의 압력을 물리치고 원칙대로 수사한 검사가 고바야시였다.
고바야시 검사, 총리가 수사 막자 강력하게 저항
그 결과 대일본제당이 자기 회사에 유리한 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의원 20명에게 400엔에서 2만 엔까지 뇌물을 준 사실을 밝혀내 중의원 의원 20명을 기소했고, 이들 중 19명에게 금고형에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일본제당 사장 에이이치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과 연결된 것이 석유 사건이었는데, 총리 가쓰라 다로가 국가 명예가 실추된다는 이유로 수사를 막고 나섰다. 그러나 고바야시는 완강히 저항했다. “총리의 말을 듣고 범죄 행위를 방치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검찰 위신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검찰이라면 나는 사직하겠다.”
고바야시가 세운 강직한 검찰의 전통은 그의 부하 오하라 나오시에게 계승되었다. 오하라는 1914년 지멘스 슈케르트 사가 해군 장교에게 뇌물을 준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일본 경제 검찰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순양함 건조를 둘러싸고 해군 사령장관(해군 중장) 마쓰모토 등이 뇌물을 받은 것을 끈질긴 수사 끝에 밝혀내 이들을 단죄했다. 해군 사령장관을 취조하기 위해 집무실로 찾아간 오하라 검사는 “착검한 총을 든 경비 수병에게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술회했다.
이 사건 때문에 일본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마모토 곤베에 총리의 내각이 총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검찰 수사가 정부를 무너뜨린 첫 사건이었다. 100년 전에 세운 이런 전통이 도쿄 지검 특수부에는 면면히 내려와 1976년에는 전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록히드 뇌물 수수 사건으로 구속하기에 이른다.
고바야시와 오하라의 후배인 이토 검사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특수부 검사의 사명은 거악(巨惡)의 퇴치입니다.… 검찰관은 국민의 소박한 정의감을 계속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거악을 퇴치할 기개 있는 검사가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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