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속 개들 싸움은 한국의 정치판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두문자 직전의 낱말들이 난무한다. 싸움을 벌이는 개들이 그냥 누렁이들이 아니라는 게 더 흥미롭다. 프린스턴 대학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과 하버드 대학 역사학과 교수 니얼 퍼거슨이니 소일거리로 허튼 싸움을 벌이는 잡종개도 아니고, 싸움을 위해 키워진 투견도 아니다. 그냥 한번 시비가 오간 것도 아니다. 2009년 봄부터 지금까지 투닥거리고 있다. 얼마나 흥미로운가. 점잖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그리고 뉴욕타임스에 이들의 원고가 오르면 전 세계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일부 언론에서는 ‘더블딥’ 논쟁으로 소개됐는데, 실은 지금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 즉 긴축정책 논쟁이라 해야 옳다. 알다시피 크루그먼은 전 세계가 1929년 대공황에 이어 제3의 대불황(첫 번째는 19세기의 공황)의 초입 국면에 들어가고 있으므로 2009년처럼 다시 대대적인 재정확장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퍼거슨은 미국의 천문학적 재정적자를 지적하며 당장 긴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미국 경제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진주만을 기억해야 한다는 역사학자다운 비유까지 동원한다. 상대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AP Photo6월27일 세계 경제위기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해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위)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언론의 호들갑과 달리 실제 내용은 그 옛날(1930년대) 케인스와 피구, 그리고 1960년대 케인스주의자와 통화주의자들 간 논쟁의 반복이다. 크루그먼은 퍼거슨이 ‘암흑시대의 경제학’에 머무르고 있다며 그야말로 구식 원론인 ‘하찮은’(크루그먼의 표현) IS(생산물 시장의 균형)-LM(화폐시장의 균형) 곡선을 강의한다. 유진 파마나 존 코크레인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케인스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세이의 법칙’이나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산물 시장의 균형과 금융시장의 균형 간의 관계는 1980년대 이후 경제학 원론이나 표준 거시경제학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반대로 퍼거슨은 주류 경제학이 케인스주의를 굴복시킨 지난 30년의 역사를 들고 나온다. 현재 케인스주의자들은 대공황의 역사에서도, 그리고 1970년대 이래의 최신 경제학, 예컨대 합리적 기대 가설에서도 배운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이 진흙탕 싸움을 간단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또 다른 의미의 진흙탕 속에 빠져 있는 정운찬 총리의 거시경제학 옛날 버전을 보면 된다.

이런 맥락을 빼면 양쪽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현실의 기준은 별로 제시되지 않았다. 단지 장기이자율이 올라가는 원인이 무엇이고 미국 경제가 갑자기 파산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를 놓고 겨룰 뿐이다. 퍼거슨은 채권시장의 투자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염려하기 때문에 장기 이자율이 올라가는 것이고 현재의 거대한 국제 불균형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므로 어느 순간 중국 등 외국의 재무성 증권 보유자들이 투매에 나서면 미국은 바로 파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장 미국의 메디케어나 실업연금 등 사회보장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지금 미국이 ‘유럽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파산 위기의 미국이 가장 안전한 투자국?

반면 크루그먼은 장기이자율이 올라가는 것은 지난해 대대적 재정지출 결과로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적어졌기 때문이고, 채권시장을 감시하는 ‘채권 자경단’이 어느 날 갑자기 일치단결해서 재무성 증권을 팔아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장기이자율에 관한 둘의 견해는 그야말로 시점의 문제에 불과하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것과 디플레이션의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같은 방향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그 양적 판단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완전히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이다.

 

 

ⓒAP Photo‘더블딥 논쟁’을 벌이는 프린스턴 대학 폴 크루그먼 교수(왼쪽)와 하버드 대학 니얼 퍼거슨 교수.


한편 미국의 재정적자가 얼마나 위험한 경지에 이르렀는가는 퍼거슨의 주장이 옳다. 미국은 파산 상태에 빠진 지 오래고 지난해의 대규모 재정지출로 회생 불가능한 지경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퍼거슨이 2년 전만 해도 ‘차이메리카’라는 기막힌 말을 만들어서 중국과 미국의 공생관계 때문에 미국의 빚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변했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유효한 것은 오히려 이 옛 주장일지도 모른다. 세계 각국이 공멸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또 세계 전체가 낭떠러지 끝에 있기 때문에 투자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나라는 여전히 미국이다. 실제로 시장에서도 미국의 CDS 프리미엄(부도 위험을 사고파는 파생상품)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이 둘이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세계경제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지를 역설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2년 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 뒤에도 주장한 바 있지만 현재의 위기는 약 10년마다 오는 산업순환상의 위기(①)에, 시장만능론이라는 30년짜리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②), 그리고 100년에 한 번쯤 오는 패권국가의 위기(③)가 겹쳐진 것이다. 3중의 위기라 할 만하다.

미국과 G20은 최소한의 금융규제도 도입하지 못했고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①위기에 대한 처방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위기의 핵심이 글로벌 불균형이고 이를 헤쳐 나가려면 새로운 국제금융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중국이나 유럽과 나눠야 하는 것이지만 미국은 그럴 의지가 전혀 없다. 크루그먼과 퍼거슨의 논쟁은 ②위기, 즉 경제학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난 1∼2주 동안의 현실은 크루그먼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용지표, 생산자 및 소비자 기대지수, 무역수지 등 모든 경제지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사록도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쪽을 더 걱정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동시에 케인스주의 처방의 핵심인 승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불황기에 아무도 돈을 쓰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재정지출을 하면 소득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소비와 투자도 늘어난다는 것이 승수효과이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지표는 세계 각국의 재정지출이 끝나자마자 회복세가 일제히 꺾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GDP의 10%가 넘는 재정적자까지 감수하면서 구입한 약이 진통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퍼거슨의 말대로 미국 정부·기업·민간, 즉 모든 경제주체의 부채는 대공황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 파산 공포 속에서 부채를 줄이려는 노력은 당연한데 그게 바로 ‘유동성 함정’이다. 재정지출로 늘어난 소득은 부채 상환에 빨려 들어간다. 버냉키가 경제회복의 핵심이라고 주장한 중소기업 대출은 일어나지 않는다. 은행도 살아남기 위해 돈을 움켜쥐려 하기 때문이다.

2009년 세계는 경제학의 모든 처방,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 처방을 동시에 사용했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고 세계는 공황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은 일부 나라가 파산 위험에 빠지자 일제히 긴축에 들어갔다. 파산 위험은 유로를 평가절하하므로 수출이 늘어날 수 있다. 그래야 긴축에 따른 내수 축소를 메울 수 있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난 경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수출을 받아들일 나라가 없다. 유럽과 일본은 L자형 장기 침체로 갈 가능성이 높고 미국은 벼랑 끝에 다시 섰다. 인도는 10% 가까운 물가상승 때문에 긴축을 해야 할 처지이고, ‘마지막 희망’ 중국은 수출 둔화와 버블 팽창을 막기 위한 투자 억제정책으로 4% 포인트 이상 성장률이 떨어질 전망이다. 즉 2009년의 확장 금융·재정정책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크루그먼의 정책 방향이 옳다 해도 실행할 수는 없다. 크루그먼의 과도한 주장은 마치 면죄부를 스스로 발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Xinhua중국은 수출 둔화와 버블 팽창을 막기 위한 투자 억제정책을 편다. 위는 상하이 엑스포 개막식 불꽃놀이.


국내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탈출구는 소득 재분배이다. 마땅하게 투자할 데가 없어서 우왕좌왕하는 돈을 세금으로 거둬들여서 저축할 여력이 없는 서민과 중소기업에 주는 것이다. 부자 감세와 복지 축소가 아니라 부자 증세와 복지 확대가 비상 탈출구이다. 한국의 예를 든다면 부자 감세를 원상회복하고 4대강 사업을 없애면 1년에 약 30조원의 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이만큼 확실한 경기회복책은 없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산 재분배를 통해 아예 거품 체질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제도적으로는 금융의 잘못된 유인구조와 부적절한 규제체계, 기업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스티글리츠 안 등 이미 많은 대안이 나와 있지만 미국도, G20도 과감하게 실행하지 못할 뿐이다. 미국의 적자에 관한 퍼거슨의 현실 진단은 사실이지만 긴축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케인스의 국제청산동맹과 같은 방향의 국제 개혁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너져가는 대영제국(채무국)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케인스는 브레턴우즈에서 미국의 젊은 관리 화이트를 만나 수모를 겪고 결국 과로로 사망했다. 이제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가 중국의 젊은 미국 유학파 관료를 설득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경제학에 ‘묘방’은 없다

왜 이런 해결책이 시행되지 않는 것일까? 간단하다. 국내외의 지배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위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퍼거슨의 주장은 그런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금융규제에 반대하고 달러 헤게모니의 약화에 저항한다. 오바마 의료개혁의 ‘중도반단’에서 보듯이 뻔한 재정 낭비도 대형 보험회사와 병원의 반대 때문에 방치된다. 한국에서는 거꾸로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건설 거품을 유지하기 위해 4대강 사업을 하고 미국식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위기는 다시 닥쳐오고 그때서야 근본적 개혁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현재의 경제학에 묘방은 없다. 그들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바로 그 때문에 고통스러운 역사는 되풀이된다. 계급 역관계를 역전시키는 나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의지를 가진 국민만이 스스로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이것이 대공황, 그리고 현재 위기의 교훈이다.

 

 

기자명 정태인 (경제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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