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부시 대통령(왼쪽)이 내놓은 구제안은 금융회사들이 ‘허락’해야 효과가 있다.
미국에는 서민이라는 말이 없다. 다만 시민(citizen)이 있을 뿐이다. 빈곤층이라는 단어도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곳이 미국이다. 빈곤층용으로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싸구려 아파트의 이름도 ‘감당할 수 있는 아파트(Affordable)’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최정점이라는 미국에도 형편이 팍팍한 서민(people)은 분명 존재한다.

미국의 서민은 월급 대신 대다수가 주급을 받는다. 집을 사지 않는 한 매달 월세를 내면서 살아야 한다. 만약 아파트를 빌려 살고 싶다면 신용등급을 높여야 한다. 문제는 신용도를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신용구매, 즉 할부라는 점이다. 900점 만점인 신용도는 금리, 아파트 따위 미국 생활의 전반을 좌우한다. 현재 신용도가 700점 이하인 사람들은 은행에서 주택대출(모기지 론)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더 큰 외상 거래를 위해 작은 외상 거래를 꾸준히 해야 하는 셈이다.

 ‘서브프라임’이란 가장 신용이 좋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프라임(최우대) 금리보다 나쁜 금리(고금리)로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금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서민 가계대출 자체를 일반적으로 서브프라임이라고 부른다. ‘모기지’는 일종의 증권으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때 그 집을 담보로 잡는다는 증서다. 한마디로 ‘비우량 주택대출’이다. 

전문가들, "많아야 20만명 구제"

올해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 파동이 세계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관계된 대출회사가 잇달아 파산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서브프라임발 신용경색 위기가 잡히지 않자 12월6일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대출자 구제안’을 직접 발표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무척 빈약했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FRB) 의장은 12월16일 미국 공중파 ABC 방송의 오전 대담에 나와 “정부의 서브프라임 정책은 잘못 됐다.(서민에게는) 차라리 현금을 받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처음에 저금리 혜택을 받게 되지만 2~3년이 지나면 원래 부담해야 하는 금리 이상의 돈을 낸다. 만약 24만 달러(약 2억4000만원)를 서브프라임으로 빌려서 첫 2년 동안 금리 5%를 적용받았다면 그 기간 매달 1000달러(약 94만원)를 이자로 낸다. 그러나 2년이 지나 금리가 10%로 뛴다면 이 사람이 부담하는 상환금 중 일부인 이자만 매달 2000달러(약 188만원)를 내야 하는 셈이다. 미국 서민은 평균 24만 달러 이상 대출을 받는다. 이자를 못 내면 주택은 압류로 넘어가고 서민들은 길거리로 내쫓긴다.

부시 대통령이 내놓은 구제안의 핵심은 서브프라임의 낮은 초기 이자율을 앞으로 5년간 한시적으로 동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서민의 집을 담보로 잡고 있는 금융회사들이 ‘허락’해야 가능하다. 미국 정부는 이를 강제할 만한 수단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는 발표 당시 인터넷판에서 이 구제안을 ‘합의안(Agreement)’이라고 불렀다. 금융회사와 백악관이 헨리 폴슨 재무부 장관의 힘겨운 중재 끝에 이뤄낸 단순 합의라는 뜻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다.

더구나 백악관은 최근 30개월 이내에 대출을 받은 사람, 자신의 집을 현재 담보로 잡고 있는 금융기관과의 직접 합의, 실제로 집에 살고 있으며 연체기간이 짧은 사람 등으로 자격을 한정했다. 현지 언론도 “연체를 두 달 이상 하고 있거나 현재 집을 압류당한 사람들이 구제를 원하는 진정한 빈곤층”이라며 구제안이 실효성이 없다고 평가 내렸다. 부시 대통령은 줄잡아 120만명이 구제를 받을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현지 전문가에 따르면 많아야 20만명뿐이라는 게 정설이다.

서브프라임의 특성상 자신의 집을 담보로 잡고 있는 금융기관을 찾는 것은 무척 힘들다. 월 스트리트의 주요 수입원인 파생상품들은 담보를 담보로 또 잡아가면서 얼키고 설키기 때문에 원래 담보증권을 찾아내기란 힘든 법이다. 부시 대통령도 “(월 스트리트가) 서브프라임은 담보를 담보로 잡는 등 복잡한 시스템으로 금융 상품화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액 산출이 불가능하다”라고 털어놓았다. 서브프라임에 해당하는 대출금은 현재 1조8000억 달러다.

대책이 부실하기는 연준도 마찬가지다. 12월18일 연준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대출 규제 법안을 만장일치로 자체 결정하고 이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의도된 뒷북이라는 비판이 많다. 연준이 18일 공개한 ‘주택소유권보호법안’은 금융기관들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모기지론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입과 자산 증명을 의무화하고 빚을 앞으로 갚을 수 있을지 검토할 것, 빚을 미리 갚을 때 위약금을 부과하지 말 것, 고금리 대출을 받을 때 브로커 비용을 청구하지 말 것. 한마디로 서민은 앞으로 대출받지 말라는 뜻이다.

ⓒReuters=Newsis서브프라임 부실 사태는 월스트리트 금융가가 서민에게 조삼모사 격으로 저금리라는 아편을 무절제하게 공급해서 발생했다.
구제안 빈곤해서 서민에게 아무런 도움 안 돼

또 연방준비이사회가 말하는 저금리란 서민의 주택대출 금리 특히 서브프라임론의 금리와는 전혀 상관없다. 뉴욕 연방은행 조사에 따르면 현재 연방 기준금리에 따라 대출금리를 조정하는 대출 상품은 서브프라임이 전체의 1%, 이보다 약간 신용도가 좋은 알트플러스라는 금리의 경우 62%만이 연준이 무려 1%나 낮춘 저금리에 기준해 대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대출 상품들은 영국 시중은행 간 단기자금 거래에 사용되는 리보(LIBOR:London Interbank Offered Rate)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서브프라임 부실 사태는 서민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금리를 부과하면서 조삼모사 격으로 한동안 저금리라는 아편을 무절제하게 공급한 월 스트리트 금융가 때문에 발생했다. 그래서 지난 여름 부실 사태로 신용경색 위기가 왔을 때 현지 전문가들은 미국이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는 것은 금융가들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결국 부실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엄청난 수혈을 감행했다. 19일에도 연준은 시장에 200억 달러의 돈을 또 풀었다. 더구나 이들의 실패를 수습하기 위해 쓰인 돈도 미국 정부 만의 것이 아니었다. 뉴욕 증시와 연계돼 움직이는 일본·홍콩·유럽 정부가 천문학에 달하는 돈을 자국 증시와 금융시장에 쏟아부었지만 정작  이로 인해 주가 폭락을 잡은 곳은 뉴욕 증시 한 곳이었다. 

마켓워치닷컴은 “주택소유권보호법안은 지금 주택대출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방준비이사회가 서브프라임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월 스트리트 큰 손을 위한 정책이라는 뜻이다. 미국 정부의 빈곤층 정책이야말로 빈곤하기 짝이 없다.

기자명 뉴욕=한정연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