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 남미 바람이 거세다. 올해 남아공 월드컵에 남미에서 5개 팀이 출전했는데, 모두 16강에 진출했다. 이중 4개 팀이 조별 리그 1위를 차지했고, 그 네 팀은 8강까지 올라왔다. 우승팀이 남미에서 나올 거라는 전망이 여전히 높다. 중미 국가도 선전해 3개 팀 가운데 2개 팀이 16강에 올랐다.

반면 전통적으로 월드컵에 강했던 유럽 팀은 이번 대회에 부진했다. 13개 유럽 팀 가운데 8강에는 겨우 세 팀만 올랐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성적과 경제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하지만 월드컵 시합 결과를 해당 나라의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비유적 이미지로 쓰는 것을 막기는 힘들다.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2대0으로 물리쳤던 날, 워싱턴포스트 경제분석가 프랑크 아렌스는 ‘월드컵 경기에서 배우는 경제적 교훈’이라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에서 저자는 “왜 그리스는 아르헨티나처럼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나”를 따졌다. 과거에 금융위기를 겪었던 아르헨티나가 슬기롭게 경제를 회복시키고 있는 반면, 유로존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그리스는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비판이었다.

스포츠를 경제와 비교하는 것은 종종 무책임한 비유로 빠질 위험이 있지만, 이번 월드컵 8강 대진표를 보노라면 늪에 빠진 유럽 경제와 도약하는 남미 경제 상황을 연상케 하는 게 사실이다. 뉴욕타임스는 7월1일 ‘앞으로 질주하는 라틴아메리카 경제’라는 특집 기사를 냈다. 중남미 경제 활황을 조명한 이 기사에서 뉴욕타임스는 “미국과 유럽이 재정 적자에 허덕이며 경제 회복이 더뎌지는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다”라고 평했다.
 

ⓒReuter=Newsis월드컵 16강전에서 브라질과 칠레가 시합을 하는 모습. 브라질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7~8%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금융연합회(IIF)는 올해 중남미 지역 경제성장률이 4.8%에 달할 것으로 보는데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1.9% 성장과 비교하면 완전히 회복세로 접어든 것이다. 중남미 지역은 올해 아시아 다음으로 가장 경제성장률이 높은 곳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이 지역 경제성장률을 4.5%로 점치고 있다. 유엔 중남미·카리브 경제위원회(Cepal)의 알리시아 바르세나 사무총장은 “중남미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브라질이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칠레·페루·볼리비아 등도 4%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분기와 올해 1분기를 비교한 성장률 순위를 보면, 남미 1위는 브라질로 9%, 2위는 우루과이로 8.9%, 3위는 아르헨티나로 6.8%다.

브라질, 24년 만에 최고 경제성장률

축구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요즘 브라질은 국운이 하늘을 찌른다. 6월30일 브라질 중앙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7.3%로 내다봤다. 이대로라면 24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게 된다. 브라질 민간 연구소에서는 8%대 성장률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아시아를 빼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경제성장률이다.
 

ⓒReuter=Newsis남미 경제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브라질과 칠레다. 왼쪽은 칠레 추퀴카마타 구리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 올해 2월 대지진 때 구리 광산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1월1일 신년 기자회견 때 “2010년은 브라질이 역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남기는 해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축구가 아니라 경제 얘기다. 룰라 대통령은 앞으로 5년 안에 브라질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5위로 올라설 거라고 자신했다. 이런 성장세를 바탕으로 브라질 기업 가운데는 미국 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6월 브라질 축산 유통기업 마프리그가 미국 기업 키스톤을 12억5000만 달러에 인수했다. 키스톤은 맥도날드 같은 체인점에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회사다. 미국인의 패스트푸드 공급선을 브라질 기업이 장악한 셈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이후 브라질 기업이 미국 대기업을 인수한 사례가 최소 8건에 이른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서 실업률은 낮아지고 있다. 브라질 노동부는 올해 신규 고용 인력 목표치를 200만명으로 잡았는데, 5월 말까지 벌써 126만명이 신규로 취직했다. 이 흐름대로라면 역사상 최대 신규 고용 기록을 깰 것 같다. 월간 실업률은 2002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 중인데, 지난 4월 실업률이 7.3%로 지난해 8.9%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이렇게 경제가 성장하는데도 물가는 올라가지 않고 있다. 올해 인플레율(물가상승률) 전망치는 5.61%, 내년은 4.8%로 전망되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건전한 수준이다.

브라질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룰라 대통령 집권 기간에 정치가 안정되고 무엇보다 중산층이 늘어나 내수 시장이 커진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룰라 정부는 2003년 집권한 이래 빈곤층을 5000만명에서 2990만명으로 줄였다. 여기서 빈곤층이란 1인당 월소득이 75달러 미만인 계층을 뜻한다. 제툴리오 바르가스 재단(FVG)은 2014년이 되면 빈곤층이 1450만명으로 줄어들리라 전망했다.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라 불리는 룰라 정부의 빈곤층 지원 정책은 빈곤층이 줄어든 요인 가운데 하나다.

빈곤층이 줄어들고 중산층이 늘어나면 내수 소비가 늘어나서 경제가 선순환하게 된다. 지난 5월13일 기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브라질 경제가 병목이나 거품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최저임금 상승과 실질소득 증가 등을 통해 소득 격차가 줄어들면서 중산층이 두꺼워졌다”라면서 브라질을 ‘중산층 국가’로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Reuter=Newsis페루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5.6%로 전망된다. 위는 페루 리마의 시장 모습.

중국이 남미 경제 견인

브라질과 함께 남미 경제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칠레다. 지난해 금융위기 여파와 올해 2월 대지진을 맞고 휘청거리던 칠레는 최근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고 있다. 지난 6월16일 무디스는 칠레의 국가 신용등급을 A1에서 Aa3로 한 계단 높였는데, 남미에서는 가장 높은 등급이다.

올해 초 지진으로 입은 피해는 지난해 칠레 GDP의 6분의 1에 달할 정도로 참혹했다. 하지만 칠레는 지난 4월 GDP가 전월 대비 8.2% 성장했다. 칠레 중앙은행은 올해 칠레 경제성장률이 5%대에 이를 것으로 본다. 지난 7년간 평균 성장률보다 높다. 칠레 대지진 때 다행히도 북부 광산 지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칠레의 주요 산업은 구리 수출을 비롯한 광산업이다.

브라질·칠레 같은 큰 나라뿐만 아니라 페루같은 소국도 경제가 회복 중이다. 페루의 4월 GDP는 지난해 4월에 비해 9.3% 증가했다. 뉴욕타임스 7월1일 기사 인터뷰에서 페루 시민 마리오 자모라 씨(70)는 “내 평생 이렇게 경제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 지난해에 페루는 1% 경제성장을 했고 올해 경제성장률은 5.6%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남미 경제가 빠르게 회복하는 이유는 아시아, 특히 중국 시장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남미가 중국의 원자재 공급지로 커나가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 중국과의 교역 규모는 10년 전 15억 달러(연간)에서 지금은 364억 달러로 늘었다. 지난해 중국이 미국(156억 달러)을 제치고 최대 교역국으로 등극했다. 브라질에서 중국으로 가는 수출품의 대부분(66%)은 원자재다.

남미 전체로는 10년 전 중국 교역 규모가 연간 100억 달러였지만 지금은 2015억 달러로 20배가 늘었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서 중국은 미국에 이어 2위 교역국이다.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중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중국은 원자재 수입을 멈추지 않았고 이것이 남미 경제를 불태우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여기에 브라질 경제 성장은 브라질을 ‘남미의 중국’으로 만들어서 주변국을 덩달아 부양시키는 형국이다. 즉 중국→브라질→주변 남미 국가로 연쇄 효과가 생긴 것이다.

중국은 남미 경제를 부양하는 큰손이지만, 한편으로는 남미 경제의 독이기도 하다. 일각에서 중국 의존도 심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알리시아 바르세나 Cepal 사무총장은 지난 5월 말 열린 회의에서 “중남미·카리브 지역 국가 경제의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1980~1990년대에 남미 경제는 미국 소비 시장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종속 경제는 미국 시장이 불황에 들어서자 손쓸 수 없이 타격을 받았다. 중국은 남미 지하자원 수입 국가이면서 소비재 수출 국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중국의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수출액은 7.3% 증가했다. 아직 중국의 남미 시장 장악은 과거 미국이 이 지역을 장악했던 수준은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남미 국가 가운데는 베네수엘라처럼 올해 -5% 경제성장률로 후퇴하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호황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4년 전 월드컵은 유럽에서 열렸다. 이탈리아가 우승하던 그때, 유럽 경제가 4년 뒤 이렇게 흔들리고, 남미가 흥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독일 월드컵에서 남미는 4강에 한 팀도 진출하지 못했다. 월드컵과 경제의 상관관계는 계속 이어질까?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은 브라질에서 열린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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