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에서 심상치 않은 반란이 시작됐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세계 축구의 판도를 밑바닥부터 뒤흔들고 있다. 서유럽이 지배해온 월드컵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80년 세월을 면면히 이어온 월드컵 징크스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난세는 새로운 영웅을 부르기 마련이고, 머지않아 새로운 태풍이 축구판을 휩쓸 것이다. 바람을 타는 자 천하를 지배할 것이요, 흐름을 거역하는 자 시대의 유랑자에 머물 것이다.

서유럽은 축구의 탄생지이자 본고장이다. 세계 축구의 빅리그가 모두 서유럽에 몰려 있기에 월드컵은 서유럽의 축구장이 문을 닫는 여름에 열린다. 1930년 제1회 대회 이래 월드컵에서 우승한 나라는 모두 7개국. 남미가 3개국(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서유럽이 4개국(잉글랜드·독일·이탈리아·프랑스)이다. 서유럽과 남미는 그동안 아홉 차례 우승을 주고받으며 세계 축구의 쌍두마차로 자리해왔다. 비록 남미가 유럽에 맞선 유일한 저항자 노릇을 해왔으나, 남미 출신 스타플레이어들의 활동무대는 대부분 유럽 리그였다. 축구에 관한 한 유럽은 세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유럽 축구가 무너졌다
월드컵 본선 티켓이 32개국으로 늘어난 1998년 이래 유럽은 초강세를 이어왔다. 세 번의 대회에서 조별 예선을 통과한 48개국 중 29개국이 유럽으로, 60.4%에 달한다. 우승국도 3개국 중 2개국이 유럽으로 66.7%다. 이런 까닭에 비유럽 국가들은 월드컵 조추첨 때마다 유럽 국가가 하나뿐인 조에 편성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유럽과의 싸움은 평균 승률이 높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피해 가고 싶었던 것이다.
 

ⓒAP Photo전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의 파비오 콸리아렐라(왼쪽)가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남아공에서는 서유럽 독주체제가 도전받고 있다. A조와 B조에서는 유럽 국가가 한 팀도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는 C조에서 간신히 2위로 진출했다. 1998년 월드컵과 유로2000을 제패한 뢰블레 군단 프랑스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최하위로 추락했다. 전차군단 독일과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도 동유럽의 복병 세르비아와 슬로바키아에 일격을 당했다. 독일은 막판에 극적으로 살아남았으나 이탈리아는 끝내 부활하지 못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에서 맞붙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동반 탈락은 서유럽이 더 이상 세계 축구의 중심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심력이 떨어지면 원심력은 커지기 마련이다. 유럽의 강호들이 쓰러진 자리마다 비유럽 국가의 선전이 눈부시다. 남미는 출전국가 모두 승승장구하며 유럽을 압박했다. 북중미와 아시아도 기대 이상의 실력을 뽐내며 복병으로 떠올랐다. 다만 월드컵마다 이변을 연출했던 아프리카의 총체적 부진이 이채롭다. 가나를 제외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초반부터 고전하며 승점 경쟁의 먹이가 됐다. 승패는 물론이고 경기 내용에서도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카메룬은 일본을, 나이지리아는 한국을 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프리카의 몫을 아시아가 차지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아프리카 축구는 활성화된 자체 리그가 없다는 점에서 유럽과 상반된다. 유럽의 명문 클럽이 개설한 축구장에서 아프리카의 유망주들이 축구를 시작한다. 이들의 꿈은 오로지 유럽 리그 진출이다. 마치 중남미 청소년들이 미국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격이다. 유럽파는 국가대항전 때만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그들의 개인기는 유럽에 비길 만하지만 팀워크는 수준 이하다. 아프리카 팀들이 대회 때마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허점을 보이는 이유다.

남미는 최근 벌어진 3개 월드컵에서 평균 3개국이 16강에 올랐다.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과 마라도나의 후예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때마다 우승 후보로 거론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두 나라를 뺀 남미 국가들은 세계 정상과 거리가 있었다. 2010년 남아공에 입성한 파라과이·우루과이·칠레 등은 이 같은 편견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모두 조별 예선에서 발군의 기량을 뽐내며 가장 먼저 16강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AP Photo프랑스 대표팀이 남아공에 패해 16강 진출이 좌절되자 괴로워하는 프랑스 축구 팬.

아시아의 질주는 월드컵 최대 이변

아시아의 부상은 남아공 월드컵의 최대 이변이다. 2002년 당시 월드컵 공동 주최국으로 16강에 동반 진출했던 한국과 일본은 8년 만에 나란히 꿈을 재현했다. 한국은 유로2004 우승국 그리스를 물리쳤고, 일본은 유럽의 다이너마이트라 불리는 덴마크를 격파했다. 두 팀 모두 정교한 세트플레이로 유럽의 아성을 넘었다는 점에서 아시아 축구의 생존 비법을 잘 보여준다. 44년 만에 월드컵에 복귀한 북한도 비록 죽음의 G조에서 예선 탈락했지만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세계 축구 팬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최국은 반드시 조별 예선을 통과한다는 월드컵의 오랜 징크스도 아프리카에서 깨졌다. 그동안 월드컵은 유럽과 남미가 번갈아 개최해 왔기에 주최국은 당연히 1번 시드를 배정받고 비교적 쉽게 16강에 올랐다.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열리기 전 상대적으로 약팀으로 분류되던 한국과 일본이 조 1위로 예선을 통과한 데는 주최국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2010년 주최국 남아공은 프랑스를 꺾고도 예선 탈락했다. 남아공은 4년 전에도 ‘차기 월드컵 개최국은 반드시 지역예선을 통과한다’는 징크스를 날려버린 불운한 팀으로 월드컵 역사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남아공 월드컵 조별 예선은 서유럽의 몰락으로 요약된다. 반발력을 극대화한 자블라니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기세다. 열여덟 번의 월드컵을 아홉 번씩 나누어 우승했던 서유럽과 남미. 이제 그 80년 묵은 징크스는 아프리카 남반부의 이상 기후 앞에서 새로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세계 축구는 맹주도 패자도 없는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기자명 육성철 (전 〈신동아〉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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