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익(편집위원.환경재단 도요새 주간)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익숙하지 않았던 낱말을 학습하게 된다.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온 국민은 ‘IMF’라는 말을 배우고 그 고유명사는 아예 보통명사처럼 사용되었다. 황우석 사건이 없었다면 ‘줄기세포’라는 용어가 그토록 자주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를 통해서 우리는 ‘유화제’라는 낯선 단어를 또 하나 접하게 되었다. 유화제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가정에서 쓰는 계면활성제라고 보면 된다. 물론 공업용일 테니 독성은 훨씬 강할 것이다.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일반 가정에서도 세제 사용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기름 유출 사고 초기 단계에서 배에 뚫린 구멍을 신속히 막지 못하고, 해상에서 기름을 거두어들이는 초동 방제에 실패하자 방재 당국은 마치 눈에만 안 보이면 된다는 식으로 해상에 유화제를 마구 뿌려댔다. 기름에 유화제를 뿌리면 점성이 약해져서 기름이 녹아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슨 기적 같은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이를테면 ‘기름+유화제→물’ 같은 화학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방재 당국은 유화제 사용해도 문제없다고 하지만…

한 자원봉사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면 유화제 사용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다. 해변에 두껍게 기름층이 떠 있을 때는 헌 옷이나 비닐 등 아무 물건이나 넣었다 빼면 쉽게 기름을 건질 수 있었는데 유화제에 의해 녹은 기름은 마치 모래알같이 파도에 휩쓸릴 뿐 건질 도리가 없다고 한탄했다. “이대로 유화제를 쓸 경우엔 이 사태는 정말 끝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건져낼 수도 없는 기름을 보고 너무 허망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방문 때는 임시로 더 많이 뿌렸다’는 ‘유언비어’도 돌았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지만 유화제 살포에 의지하는 방재 당국이라면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유화제를 뿌리기로 결정했을 때 과연 얼마나 신중하게 고민했는지 의문이다.

유화제 사용에 대해 방재 당국은 나름의 논리를 앞세우며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12년 전의 시프린스 호 사고 이후 수심 10m 이하의 해역과 어장 양식장에 3시간 이내에 도착하는 지역에서는 유화제를 전혀 사용할 수 없으며, 수심 10~20m 지역은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기타 지역은 책임자가 판단한다는 따위 철저한 사용 지침이 있으며 이를 지켰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사용한다’는 표현에 웃음이 나지만, 이 표현을 빌리더라도 유화제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만큼 위험한 물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되도록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도 방재 당국은 지침을 지켰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좀 더디더라도 직접 기름을 걷어내는 것이 유화제로 녹여버리는 것보다는 좀더 나을 게다. 유화제에 의해 ‘녹은’ 기름들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숨어버렸기에 회수가 더 어려우며, 바다 생태를 장기적으로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바다로 변해버린 서해가 원상회복될 수 있을까? 아무리 자연의 자정 능력이 크다 하더라도 원래대로 돌아가기는 힘들 터인데 방재 당국의 유화제 사용 결정은 서해에 시한폭탄을 장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더 염려된다. 유화제에 의해 ‘녹은’ 기름은 당장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령처럼 바다 밑을 떠다니다가 적당한 크기로 뭉쳐져서 적당한 수온을 만나면 쿨렁 하고 폭탄처럼 솟아오를 것이다. 그곳이 무인도 앞바다가 될지, 가두리 양식장이 될지, 해수욕장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 스스로가 기름의 형체를 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체 없는 기름 폭탄의 습격을 받게 생겼다. 자업자득이라고 한탄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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