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은 둥글다. 공은 둥글기에 FIFA 랭킹 47위 팀(한국)이 13위 팀(그리스)을 잡을 수 있었다. 둥근 공이 만든 마법은 거기까지였다. 7위 아르헨티나 벽은 높았다. 그리스를 잡은 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실망도 컸다. 아르헨티나에 대패하자, 자살골을 넣은 박주영, 숭숭 뚫린 오범석, 결정적인 반전 찬스를 놓친 염기훈을 일컬어 ‘박오염’이 경기를 망쳤다는 비난마저 쏟아진다. 

그러나 그라운드를 종횡 무진한 리오넬 메시 한명 몸 값(1183억원)이 한국 대표팀 전체 몸값을 합친 것보다 2배나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실력차는 실력차. 인정하자. 매 경기마다 이긴다면, 가슴 졸이며 거리 응원을 할 이유가 있을까.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지만 17일 거리 응원을 즐긴 이들은 23일 나이지리아전에 기대를 걸었다. 

ⓒ시사IN 조남진아르헨티나 골이 터질 때마다 응원에 나온 시민들은 장탄식을 멈추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벽은 사람보다 캔맥주가 먼저 간파했다. 경기 전, 두 개 5000원 하던 캔맥주 가격이 한 개 1000원으로 뚝 떨어졌다. 밤 9시45분 곤살로 이과인이 해트트릭을 기록하자 시청 광장을 메웠던 십만 붉은 악마의 사기도 같이 떨어졌다. 앞서 밤 9시 30분 이과인 선수의 세 번째 골이 골대를 가르자, 붉은색 야광뿔을 머리에 두른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반면 경기 결과를 떠나 응원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늘었다. 아예 마음을 비우고 응원에 몰입한 것이다. 

ⓒ시사IN 임지영김수로를 닮은 외모에 ‘김슈로’라는 이름을 붉은 티셔츠에 새기고 광장을 찾은 ‘김슈로와 아이들’의 장진환씨(가운데)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가슴을 졸이는 이들이 많았다. 밤 8시46분 한국 선수로는 월드컵 역대 두 번째 박주영 선수가 자책골을 넣자 순간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정장 안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출근해 하루 종일 직장동료한테 놀림을 받았다는 전정수씨(38)는 아쉬움에 동료의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학교가 모처럼 야간자율학습시간을 빼줘, 4시부터 시청광장 자리를 맡았던 최한솔·솔민지양(17)도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박주영 선수의 선전을 바랐기 때문에 더 그렇다. 민지양은 “박주영이 메시를 1대1로 잡긴 어렵다. 우리가 방어를 잘 해야 할텐데.., 그래도 이길 거다”라고 말했다. 

밤 9시15분 민지양의 바람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전반 종료 직전, 민지양은 괴성을 질렀다. 민지양 뿐인가,  광화문 일대, 한반도가 들썩였다. 이청용 선수가 극적인 만회골을 넣었다. 호프집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리를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김수로를 닮은 외모에 ‘김슈로’라는 이름을 붉은 티셔츠에 새기고 광장을 찾은 ‘김슈로와 아이들’의 장진환씨(28)도 일행을 붙잡고 펄쩍 펄쩍 뛰었다. 마음껏 즐겼다. 

ⓒ시사IN 임지영축구광 사장 덕에 응원에 나온 이주노동자 로히드와 아디
파주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로히드(29)와 아디(25)도 환호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장 덕에 응원전에 나왔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붉은 악마가 된 로히드는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이미 광장에서 축구공은 만국 공통어였다. 아디는 한국인 누구보다 한국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바랐다. 그는 “축구광 사장 덕에 16강 8강에 나가면 휴업을 할지도 모른다”라며 즐거워했다.   

이날 거리응원에는 가족 단위 응원객들도 많았다. 한국인 아내 조애리씨(49)와 세 아이들, 조카와 함께 시청 광장을 찾은 미국인 매튜(51)는 한국의 거리 응원이 처음이다. “NBA, 슈퍼볼처럼 여럿이 즐기는 응원은 미국에도 있지만 광장에 나와 이렇게 단합된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다.” 여섯 가족은 경기 내내 열띤 응원을 했다. 이들처럼 시청광장 일대엔 가족단위가 많았다. 특히 광화문은 열띤 응원전보단 한가하게 경기를 즐기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눈에 띄었다. 손정수(61)씨는 “승패와 관계없이 7살 손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축제를 보여주기 위해 찾았다”라고 말했다. 

김영호씨(32)는 이날 10만원을 벌었다. 친구와 내기를 한 것이다. 김씨는 아르헨티나가 이기는 데 걸었다. 그는 “이기긴 했지만 돌아가는 뒷맛이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김씨와 함께 응원 나온 6살 아이는 광화문 광장 분수 사이를 뛰어다니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16강에 진출해 아이의 웃음을 계속 보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빨간 물결 사이 선명한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그린월드컵’이란 띠를 두른 김연희(33), 신연경(29)씨는 결과와 상관없이 경기를 전후해 시청광장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줍는 걸 잊지 않았다. 

ⓒ시사IN 임지영거리 응원에 처음 나온 미국인 매튜(51) 가족.
한골을 내줄 때마다 눈물을 훔치던 김현아씨(22)는 막상 경기가 끝나자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졌지만 응원하면서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선수들이 기 죽지 않고 다음 경기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경기가 마무리되고 난 10시 반. 아쉬움에 근처 커피숍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관전평을 이어갔다. 김진원씨(28)는 “실력차가 있었다. 내가 열심히 응원을 안 해서 그런 것 같아 아쉽다. 다음엔 더 일찍 와서 응원하겠다. 나이지리아전에선 박주영 선수가 세골을 넣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경기가 끝난 지 한 시간 넘도록 시청 광장에 남아 응원가를 부르고 길거리 청소를 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같은 자리에서 그리스와 나이지리아의 경기를 지켜보기도 했다. 이날 시청광장과 광화문 일대의 12차선 도로는 응원전으로 통제가 됐다. 시청에서 광화문 사이 7개 전광판 앞에 모인 사람들이 차로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구급차 한 대만 서행했다. 이날의 인기 응원도구는 빛이 나는 빨간 뿔 머리띠였다. 경찰관 두 명도 모자에 뿔을 둘렀다. 밤이 깊어지자 광장은 빛 물결로 넘실댔다.  거리 메뉴는 다양해졌다. 닭똥집, 곱창 같은 안주에서부터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 파는 동그랑땡, 주먹밥도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 일찌감치 돗자리를 펴고 앉은 가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치킨이다. 넥타이부대에게도 ‘치맥(치킨+맥주)’가 최고 인기였다. 중요하거나 무거운 짐을 맡아 보관하는 임시 물품 보관소를 연 업체도 있었다. 

공은 둥글고 우리에겐 세 경기가 남아있다. ‘Again 2002’를 꿈꾸는 한국과 나이지리아전 뿐 아니라, ‘Again 1966’의 가능성을 보여준 북한도 두 경기나 남겨두고 있다. 둥근 공이 부리는 마법을 마음껏 즐기자. 21일(북한-포르투칼)과 25일(북한-코트디부아르)에는 ‘통~일조국’을, 23일(한국-나이지리아)에는 대~한민국을 외쳐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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