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응원가란 무엇인가. 12번째 선수인 관객이 몸 대신 목소리로 경기장에서 뛸 수 있는 순간이다. 공의 향배와 선수들의 상태가 응원가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바닥난 체력을 보정하기도 하고 상대 팀의 월등한 실력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만약 응원가가 없다면, 홈 어드밴티지의 위세도 맹렬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2002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한국이 4강에 진출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광장이 있었고 응원가가 있었다. 모두 우리에게 최초의 경험이었다. 언제 그렇게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의 염원으로 크게 노래한 적이 또 있었던가. 그 순간의 각별한 추억이,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월드컵 시즌이 특수가 된 건지도 모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다시 온다면 만끽할 수 있는 안전한 광기에 대한 기대로. 함께 승리를 기원하며 응원한다는 경험이 워낙 각별하다보니, 그 순간이 반복되면 문화가 된다. 축구 종주국, 아니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축구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국이 바로 그렇다.

2002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광장과 응원가 덕이다.
2000년대 이후 영국 록의 특성 중 하나는 허밍으로 떼창(합창)할 수 있는 코러스가 유독 많이 쓰인다는 것이다. 즉 가사를 몰라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힘찬 멜로디가 곡의 주요 테마를 이룬다. 카사비안, 프라텔리스, 카이저 치프스 등이 그런 흐름의 중심에 서 있는 밴드이다. 이런 흐름이 영국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고 또한 힘을 얻은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영국의 일상 곳곳에 스며 있는 응원 문화 덕분이다. 지난해 영국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거리 풍경 중 하나는, 청년들끼리 단체로 구호를 외치거나 합창하며 장난치는 모습이었다. 시즌 오프 기간만 빼고 늘 경기장에 가거나 퍼브(술과 여러 음료, 음식을 파는 대중 술집)에 모여 텔레비전으로라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시합을 봐야 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응원 문화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거다. 그런 응원 문화 역시 자연스럽게 음악에 녹아들어서 떼창을 유도하는 노래로 발현되는 것일 테고.

한국 응원가는 하향식·작위적으로 탄생

한국의 경우, 아래에서 형성되는 응원가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즉 관중의 구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아니면 누군가 개사한 기존 노래가 응원가로 굳어지는 경우가 없다는 거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집단지성의 산물을 찾기 힘들다고 할까. 예외적이고 잘 알려진 사례로 ‘오 필승 코리아’ 정도가 있을까. 대다수 노래가 구단에서 운영하는 응원단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아니면 구단에서 외부 뮤지션에게 의뢰한 노래들이 공식 응원가가 되곤 한다. 개별 선수를 응원하는 노래는 유행가에서 가사를 바꿔 그때그때 써먹는 일도 다반사다. 상향식이 아니라 하향식이며 자발적이 아니라 작위적으로 응원가가 탄생한다. 그러다보니 특정 팀의 팬을 제외하고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거나 유행가를 개사해서 쓰는 경우는 함께 부르기가 어색하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는(아마 다른 유럽 국가도 비슷할 것이다) 반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공식 응원가인 ‘Glory Glory Man U’는 본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군가였던 ‘공화국의 전송가’를 개사한 것이다. 1980년대 초부터 맨유 팬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했던 이 노래는 토튼햄 핫스퍼,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도 자신들에게 맞춰 부른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응원가다. 팬들이 만들어낸 응원가는 팀의 공식 응원가로 채택됐고, 아예 맨유에서 발행하는 잡지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장 많은 팬을 자랑하는 맨유의 응원가도, 리버풀 FC의 응원가에 비하면 약소하지 않을까. ‘You’ll Never Walk Alone’ 말이다. 194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회전목마〉를 통해 태어난 이 노래를 리버풀이 응원가로 채택하게 된 배경은 1963년 리버풀 출신의 밴드 게리 앤 페이스메이커가 리메이크하면서다. 이 노래는 곧바로 관중에 의해 리버풀의 시합 때마다 불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노래 자체의 멜로디는 처연하지만 수만 관중이 쏟아내는 떼창 앞에서는 그런 거 필요없다. 노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네 뒤에 나 있다’라는 진정한 응원의 메시지 덕에 . ‘You’ll Never Walk Alone’은 리버풀뿐 아니라 프리미어리그 전체, 아니 유럽 축구 전체를 상징하는 응원가가 됐다. 역시 관중이 채택했고 전파했다.

ⓒReuter=Newsis리버풀 FC(위)의 ‘You’ll Never Walk Alone’은 유럽 축구를 상징하는 응원가가 되었다.

클럽 응원가와는 달리 국가대표팀의 응원가는 시합 자체가 일반적인 일이 아니기에 전통의 노래가 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인기 곡을 개사하거나 새로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단, 철칙이 있다. 유명 밴드가 자신이 만든 노래를 연주하고 대표팀의 선수가 보컬로 초빙되어 노래를 해야 한다는 거다. 

대표 사례로 1990년 뉴 오더가 발표한 명곡 ‘World In The Motion’과 1996년 영국 그래미상까지 받았던 ‘Three Lions’가 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일까, 뉴 오더는 아직까지 콘서트에서 ‘World In The Motion’을 연주한다. 또한 월드컵이나 유럽선수권 등 국가 대항전(A매치) 때마다 쏟아져나오는 응원가 중에서도 단연 명곡으로 꼽히는 곡이기도 하다. ‘Three Lions’의 경우 단순한 응원가를 넘어 바야흐로 토니 블레어와 노동당, 데미언 허스트, 브릿팝 등 ‘쿨 브리타니아’의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노래로 꼽힌다. 이렇다 할 월드컵 주제가가 없던 그전과는 달리, 2002년 이후 우리도 많은 응원가를 갖게 되었다. 월드컵과 상관없이 오래도록 부를 응원가를 갖고 싶다. 애국주의나 공자님 말씀풍의 격려 가사로 점철된, 따라 부르기도 힘든 한철 장사 응원가 말고.

기자명 김작가(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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