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탱크’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행동하는 주장이다. 말할 필요가 없다. 누구보다 많이 뛰는 성실함, 포기를 모르는 강한 의지면 충분하다.
박지성에게 이번 월드컵은 마지막이다. 본인도 최근 남아공 월드컵을 국가대표 은퇴 무대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앞으로 4년 후면 33세. 박지성은 세밀한 기술보다는 왕성한 활동량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라 4년 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지금 같은 기량을 보이기는 쉽지 않다. 박지성은 “지금도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걸 느낀다”라고 토로한다.

ⓒ뉴시스박지성은 대표팀에서 승부사 구실을 해야 한다. 이청용은 월드컵에서 공격 본능을 맘껏 펼칠 태세다.

박지성은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을 앞두고 주장이 됐다. 그가 후배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유는 그가 세계 최고 명문 팀에서 뛰기 때문이다. 또 에인트호벤·맨유 소속으로 유럽챔피언스리그 등 축구선수가 뛸 수 있는 굵직한 대회를 모두 뛰어본 경험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박지성은 모든 후배에게 우상이다.

황선홍 부산 아이파크 감독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박지성이 그라운드에서 포기를 모르고 열심히 뛴다면 다른 후배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 박지성은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다. 박지성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플레이를 해주면 다른 모든 선수들도 긴장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박지성이 흔들린다고 생각해보자. 다른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정말 끔찍한 상황이 초래되고 만다. 그래서 박지성이 중요하다.

박지성은 국가대표로 올 때마다 큰 부담을 느끼는 게 있다. 바로 해결사 능력이다. 맨유에서는 과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비롯해 웨인 루니, 루이스 나니,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등 좋은 공격력을 갖춘 요원이 많다. 거기에서 박지성은 해결사가 아니라 도우미형 공격수였다. 공격 요원들이 미리 커버하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 가서 흐른 볼을 노리거나 공격수들이 공격에 전념하는 동안 드러날 수 있는 수비의 허점을 메우는 식이다.

비상을 꿈꾸는 ‘쌍용’

그러나 대표팀에서 박지성의 역할은 달라진다. 조력형 공격수나 미드필더로는 안 된다. 승부사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박지성은 “박주영 등 동료들의 공격력이 뛰어나다. 축구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어서 큰 부담은 없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겉으로만 그렇다고 할 뿐이다. 한국을, 아니 아시아를 대표하는 빅 스타 박지성이 어떻게 국가대표팀에서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긍정적인 것은 박지성이 그동안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많이 싸워보면서 해결사 능력도 많이 향상시켰다는 사실이다.

ⓒ뉴시스한국 대표팀의 ‘대표 해결사’로 활약할 박주영. 기성용은 유럽에서 성공한 중앙 미드필더가 될 듯하다.

축구는 미드필더 싸움이다. 미드필더가 강하면 경기를 주도하게 되고 그만큼 찬스는 많이, 위기는 적게 맞는다. 박지성-이청용(볼턴)-기성용(셀틱)-김정우(광주)로 구성될 한국 미드필더진은 역대 최강이다. 박지성과 함께 핵심 역할을 할 쌍용(雙龍)의 존재 덕분이다.
이청용은 볼턴에서의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한 시즌 동안 공격 포인트 10개를 넘겼고 주전도 꿰찼다. 또 볼턴이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한 이적으로 평가받고 있고 리버풀 등 빅 클럽으로의 이적설까지 나온다. 이제 남은 목표는 월드컵 16강이다. 이청용은 월드컵에 대해 “월드컵에서 수비만 하지 않겠다. 내가 가진 공격 본능을 맘껏 펼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청용이 유럽파 중 큰 기대를 얻는 것은 그가 세계 정상급 수준의 기술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앞서 유럽에서 활약했거나 현재 활약 중인 박지성·이영표·설기현 등은 기술보다는 체력과 성실함으로 승부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청용은 테크니션이다. 기술에서 유럽 선수들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 축구가 한 계단 더 도약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이청용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이청용은 이번 월드컵에서 오른쪽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한다. 이청용은 한국 프로축구에서 반 시즌을 뛴 뒤 유럽으로 가서 휴식 없이 한 시즌을 곧바로 소화했다. 1년6개월 동안 쉬지 못한 셈. 체력적으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볼턴이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한 뒤 이청용에게 휴식을 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

기성용은 이청용과는 또 다른 기대감을 준다. 기성용의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다. 축구에서는 센터 포워드, 중앙 미드필더, 중앙 수비수, 골키퍼를 센터 라인이라고 부른다. 팀의 주축 노릇을 하는 뼈대와 같은 선수들이다. 물론 기량도 좋고 연봉도 높다.
지금까지 한국 유럽파들은 좀처럼 센터 라인을 정복하지 못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측면 공격수로 뛰었다. 박지성·이영표·설기현도 측면 요원이었다. 아시아 선수에게 성역처럼 여겨진, 유럽 선수에게는 자신들의 자존심으로 지켜온 센터 라인이 한국의 젊은 피 기성용에게 길을 내준 것이다.

시즌 막판 기성용은 많이 뛰지 못했다. 시즌 중반 팀에 합류한 데다 자신을 영입한 감독까지 경질되면서 출전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강력한 중거리 슈팅, 좋은 신체조건(키 187cm), 세계 정상급 프리킥 능력과 수준급 패싱력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모두 좋은 조건을 갖췄다. 그리고 그는 이제 스물한 살이다. 이대로 잘 성장한다면 한국 선수 중 가장 성공한 중앙 미드필더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성용은 이번 월드컵에서 김정우와 중원을 지킨다. 김정우가 수비에 무게를 둔다면 기성용은 공격 비중을 높인다.

한국 최고의 해결사 박주영

강력한 미드필더진의 지원 사격을 받아 골로 마무리할 해결사는 박주영(25·AS 모나코)이다. 박주영은 이번 시즌 팀에서 간판 공격수로 활약하며 주전 자리를 완전히 굳혔다. 박주영이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경기에서 AS 모나코는 지난 2년 동안 거의 패하지 않았다. 아시아청소년대회 득점왕과 MVP에 올랐고, 프로 데뷔 시즌에 K리그 신인상과 시즌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원래 갖고 있던 공격적인 자질은 프랑스 리그에서도 여전히 빛났다. 박주영의 진가는 골 장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른 한국 공격수들이 문전에서 허겁지겁 슈팅을 날리거나 주춤거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것과는 달리 박주영의 드리블과 슈팅은 간결하고 깔끔하다. 박주영이 골대 앞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한두 차례 빠른 전진 드리블에 이은 송곳 슈팅, 감각적인 논스톱 슈팅으로 골을 넣는다. 박주영의 골 장면은 세계 최고 수준의 킬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뉴시스이영표는 측면 수비를 책임진다. 월드컵과는 유난히 인연이 멀었던 스트라이커 이동국.

박주영은 월드컵에서 선발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동국(전북)이 좋은 컨디션을 보이고 있지만 박주영이 과거 1년 넘게 이근호(이와타)와 좋은 호흡을 보이며 많은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주영은 이동국과 손발을 맞춰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박주영을 조커로 돌리기에는 그가 유럽에서 쌓은 경험과 꾸준한 득점력이 너무 아깝다.
국내 선수 중에는 이동국에게 많은 시선이 쏠린다. 이동국은 열아홉 살 때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이후에는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게으르고 자만하다는 이유로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버림받았다. 2006 독일 월드컵 때는 개막 2개월 전 프로축구 경기 도중 무릎을 크게 다쳐 월드컵 출전의 꿈을 또 날렸다. 이제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다. 4년 후 월드컵에 그가 다시 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마추어 스포츠에는 비운의 스타라는 게 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자주 정상에 올랐지만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를 의미한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프로축구에서 좋은 활약을 해도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하고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한 선수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 그런데 이동국은 그것보다 더했다. 1998년 국내 프로축구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신인왕에 올랐지만 그 이후에는 내리막길만 탔다. 두 차례 월드컵도 못 나갔고 독일(베르더 브레멘), 영국(미들즈브러) 등 해외 프로 생활에도 실패했다. 최근 10년간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이동국은 지난해 K리그 득점왕과 MVP에 오르며 소속팀 전북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고 올 시즌에도 소나기골을 터뜨리며 화끈한 부활을 선포하고 있다. 이동국은 “남아공 월드컵을 마지막 월드컵으로 여기고 여유로우면서도 후회 없이 준비하고 있다. 월드컵에 나만큼 더 뛰고 싶은 선수가 또 있겠느냐”라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동국은 선발로 뛰는 스타일인데 대표팀에서는 조커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뉴시스이동국과 함께 조커로 대기할 공격수 안정환. 대표팀 수비의 핵심인 골키퍼 이운재.

이동국과 함께 조커로 대기할 공격수는 베테랑 안정환(다롄 스더)이다. 그의 나이 서른넷.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안정환의 장점은 풍부한 경험, 문전에서의 침착함, 그리고 위협적인 슈팅이다. 조커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상대 수비진을 뒤흔들면서 허점을 유도하는 저돌적인 파이터가 하나고, 둘째는 막판 한두 차례 슈팅을 골로 연결할 수 있는 해결사다. 안정환은 후자에 해당한다. 월드컵처럼 강한 팀과 맞서 긴장된 가운데 경기 막판 15~20분 동안 한두 차례 슈팅 기회를 잡는 자체가 힘들다. 그렇게 적은 기회에서 골을 넣는 것은 물론 더 힘들다. 그래서 산전수전 다 겪은 안정환이 필요하다.
스포츠에서는 모든 단체 종목에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있다. “공격력이 좋은 팀은 한 경기를 이길 수 있어도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수비가 강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수비가 좋은 이탈리아는 월드컵 정상에 4번이나 섰지만 공격 위주의 네덜란드는 준우승만 두 번 했다. 특히 약한 팀은 무엇보다 수비 안정이 최우선 과제다. 월드컵에서 강호에게 1~2골을 내주면 뒤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 대표팀 수비의 핵은 수비수라기보다는 골키퍼 이운재(수원)라고 보는 게 옳다. 이운재는 2002 한·일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등 최근 한국 축구대표팀에서 부동의 넘버원 골키퍼였다. 다만 올 시즌 프로축구에서 훈련 부족 등으로 다소 부진한 플레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걱정스럽다.

그래도 믿을 사람은 이운재뿐?

축구에서 큰 대회를 코앞에 두고 있거나 대회 또는 시즌 도중 심한 주전 경쟁을 시키지 않는 포지션이 바로 골키퍼다. 골키퍼의 생명은 안정감에 있다. 주전 경쟁을 심하게 하는 골키퍼는 경기 도중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감독에게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줘야만 주전을 차지할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공격수는 9번 헛발질하다가 1번 골을 넣으면 스타가 된다. 하지만 골키퍼의 실수는 곧 실점을 의미하며 강팀과 싸울 때 실점은 곧 패배를 뜻한다. 그래서 골키퍼에게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가장 중요하다. 감독들이 큰 대회에서는 기량이 좋아도 경험이 적은 골키퍼보다는 기량이 다소 떨어져도 경험이 풍부한 골키퍼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란이 있겠지만 이운재가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활약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최근 2년 안팎 월드컵 예선 등을 치르면서 이운재를 너무 믿은 나머지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지 못한 탓에 이운재의 부진을 자초한 것은 분명히 코칭스태프의 책임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겨를이 없다. 그리고 이운재는 수비 라인을 적극적으로 이끌 수 있는 강한 리더십까지 갖췄다. 중앙 수비수로 수비 라인을 전체적으로 조율한 조용형(제주 유나이티드)이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수비 라인을 이끄는 데 부족한 부분을 이운재가 메워줄 수 있다. 몸무게 논란, 음주 파문 등 잇단 어려움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재기에 성공해온 이운재가 확실한 플레이로 다시 한번 모든 논란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다.

기자명 김세훈(경향신문 축구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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