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고는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부정·관권 선거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곽노현 서울교육감 당선자가 5월31일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한 고발장의 일부다. 피고발인은 이진성 서울시 선거관리위원장이다. 각종 선거 기간 중에 후보자들이 상대 후보를 검찰과 선관위에 고발하는 일은 흔하지만 선관위를 고발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게다가 이진성 서울시 선거관리위원장은 서울 중앙지법원장이다.

곽노현 당선자는 왜 선거 막바지에 선관위원장을 고발하는 ‘무리수’를 뒀을까? 다시 고발장으로 돌아가 보자. “서울시 선관위가 관악구 은천동(옛 봉천동) 관내 4000여 세대에 선거 공보물을 발송하지 않았다. (중략) 피고발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곽 후보의 선거 공보물 4000부를 발송하지 않은 것은 공직선거법 제240조 3항 위반이다.”

선거 막판 피를 말리는 상황에서, 사실상 공보물이 선거 운동의 전부인 점을 감안할 때, 전통적 진보 우세 지역인 은천동에 공보물 4000여 부를 발송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사자로서는 묵과하기 힘든 일이다. 곽 당선자와 2위인 이원희 후보의 최종 득표차는 4만6000여 표에 불과했다.
 

ⓒ뉴시스선관위의 중립성이 의심받는 상황이 2012년 총선·대선까지 이어지면 큰 혼란이 올 수도 있다. 위는 5월14일 선관위원장을 고발한 시민단체 회원들.

물론 곽노현 후보가 당선된 만큼, 그리고 역설적으로 선거 막바지 ‘공보물 누락 사건’으로 인한 언론 노출이 곽 후보 홍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 이 사건은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이 고의적이라는 증거가 없고, 돌이켜보면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근거 역시 희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 기간에는 유독 선관위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많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한나라당 후보 사무실과 같은 건물에 투표소를 설치했다가 항의를 받고 부랴부랴 옮긴 일, 유권자가 투표 사무원으로부터 ‘오세훈’에 기표된 서울시장 투표용지를 배부받은 일, 도지사 투표용지를 배부받지 못한 일 등 전국 각지에서 황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선관위가 아니라 여당 선거대책위원회?

물론 선거 와중에 선관위가 입길에 오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선관위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이번처럼 광범위하게 제기된 것은 오랜만이다.

선관위는 국회·행정부·법원·헌법재판소와 같은 지위를 갖는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이다. 중앙선관위는 대법원장이, 산하 각급 선관위는 판사가 당연직 위원장을 맡는다. 1963년 창설 이후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있으나 마나’한 기관이었지만 1988년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역대 대법관 중에 가장 진보적이고 강단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이회창 대법관’이 중앙선관위 위원장에 취임한 것. 이회창 대법관은 선관위원장 취임사에서 “선관위를 헌법기관으로 만든 것은 중립성을 지키라는 이유에서다. 앞으로 특정 정당의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불법·탈법이 극심했던 1989년 4월 동해 재선거, 8월 영등포을 재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을 포함한 평민·민주·공화 4당 후보와 사무장을 모두 검찰에 고발했다. 각 당 총재에게는 경고장을 발송했다. 이후 선관위의 중립성에 대한 의구심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선관위가 현직 대통령에게 경고를 할 정도였다.
 

ⓒ뉴시스6월2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후보(왼쪽)가 자신의 공보물 4000여 부를 발송하지 않은 서울시 선관위를 방문해 항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중립성을 의심받을 만한 사례가 하나 둘씩 쌓였다. 한나라당 윤리강령기초위원장, 2007년 대선 국면에서 이명박 후보를 공개 지지한 ‘나라선진화·공작정치분쇄 국민연합’의 부의장,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 편찬 집행위원 등을 지낸 강경근 숭실대 교수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중앙선관위원으로 지명됐다.

또 중앙선관위는 무상급식, 4대강 반대 홍보조차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하며 금지한 반면, 정부의 무차별적 홍보에 대해서는 모르쇠 내지 구두 경고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서는 전라남도 선관위 내부에서조차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 아니냐”라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아니라 (여당)선거대책위원회다”라는 말이 나돌 만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판국이니 예전 같으면 선거 관리 과정의 실수로 치부될 사안에 대해서도 국민과 야당은 날 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지역 선관위 경험이 있는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신뢰를 쌓는 건 오래 걸려도 무너뜨리는 건 금방이라는 격언이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 선관위다. 선관위의 중립성이 무너졌다고 보지는 않지만 정부 눈치를 너무 본다는 느낌은 든다”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또 “내 눈에 이럴 정도면 야당이나 일반 시민들 눈에는 더 할 것이다. 선관위는 스스로의 권위에 대해 좀 더 엄격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지방선거는 전초전에 불과할 수 있다. 선관위의 중립성이 의심받는 상황이 2012년 총선·대선까지 이어지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후보자들에 의한 불법 선거운동은 있었을지언정 국가 선거 관리에 대한 의구심이 광범위하게 제기된 적은 없다. 깨져서는 안 될 전통이다.

기자명 윤태곤 (프레시안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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