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대선 기간 내내 선두를 독주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11월27일 서울에서 첫 유세를 펼치는 모습.
12월13일 저녁,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서울 광화문 사거리 동화면세점 앞 광장에 서 있었다. 목에는 주황색 목도리를 두르고, 손에는 촛불을 들었다. 그의 옆에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와 김근태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 또한 정 후보와 똑같은 차림새였다. 범여권의 유력 정치인이 모두 한데 모였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서울 유세는 비장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정동영 후보가 단상에 올랐다. “문국현 후보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은 대통령이 되는 것만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인제 후보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의 목표는 대통령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쉬고 갈라졌다. 그는 “민심이 요동치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라고 외쳤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마지막으로 범여권 단일화 성사에 ‘올인’하고 있다.

같은 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텃밭인 대구와 부산 시내를 누비고 다니며 막판 지지를 호소했다. 이 후보는 대구 서문시장 앞을 메운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경험도 없고, 무능한 정권을 바꾸기는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바꿔야 합니까.”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을 연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그냥 지지가 아니라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지지로 완전히 기를 꺾어야 합니다.”

한나라당의 목표는 이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 아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당에 중대 과제가 주어졌다. 투표 참여율을 높여 55% 이상 득표하는 게 우리 목표다”라고 밝혔다. “그래야 안정적인 국정을 도모하고 지역감정을 누그러뜨려 국민통합을 도모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명박 캠프의 핵심 측근은 이제 대선보다 총선과 이후 정국 운영 방안에 관심을 쏟고 있다.

“한 방이면 그냥 간다”던 이해찬 전 총리의 말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이제 곧 경천동지할 대변화가 올 것이다”라던 무소속 이회창 후보의 예측 또한 무위로 끝났다. “역대 대선에서 한국 보수 세력이 내놓은 최약체 후보”(소설가 고종석씨)라던 이명박 후보가 역대 어떤 대선 후보도 얻지 못했던 과반 득표를 코앞에 두고 있다.

2007년 대선이 이명박 후보의 독주와 범여권 후보들의 지리멸렬 속에 끝나가고 있다. 이번 대선을 여야 정치권과 정치 분석가들의 말을 통해 복기해본다.

이명박 후보의 상대는 노무현 대통령?

지난 9월5일 한겨레 장봉군 화백은 여느 날처럼 만평 소재를 얻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이날은 대통합민주신당의 예비 경선이 끝나고 정동영·손학규·이해찬·유시민·한명숙 후보가 본경선에 돌입한 첫날이었다.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던 장 화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신당 경선 후보가 결정되던 바로 그날,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후보를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해버린 것이다. 장 화백은 일필휘지로 다음 날 만평을 그려냈다. 난간에 선 이명박 후보가 멀리 무대 위에 나란히 선 신당의 다섯 후보를 내려다보며 “누가 맞수가 되려나?”라고 혼잣말을 하는 뒤쪽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슬며시 떠오르며 “나다!”라고 외치는 만평이다.

2007년 대선을 지배한 최대 화두는 역시 ‘노무현 심판론’이었다. ‘이번 대선이 부패 세력 대 반부패 세력의 대결이다’라는 여권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다. 반면 여론조사를 해보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는 야권의 주장에는 국민 절반 이상이 늘 호응했다.

대통합민주신당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선거를 지배하고 있다. 어떤 네거티브 공세를 펼쳐도 ‘안티 노무현’ 분위기에 먹혀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대선 막판까지 정국 이슈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정동영 후보에게는 불운이었다. 노 대통령은 물론 당내 친노 그룹과의 관계 설정에서 정 후보는 딜레마에 빠졌다. 선거 운동을 위해서는 노 대통령과 확실하게 단절해야 하지만 당내 융합을 위해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막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이명박 후보의 경쟁 상대가 정동영 후보인지 노무현 대통령(의 그림자)인지 모르는 이상한 대선 구도가 한동안 이어졌다.

ⓒ시사IN 한향란11월27일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운데)는 남대문 앞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명박 대 이명박.’ 9월16일 손호철 교수(서강대 정치학)가 쓴 한국일보 칼럼 제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대선은 이명박 대 손학규도, 이명박 대 정동영도, 이명박 대 이해찬도, 이명박 대 문국현도 아니고 이명박 대 이명박의 대결이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 민기획 대표도 같은 말을 했다. “이번 대선은 이명박이냐 아니냐의 싸움이다”라고 말한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의 말도 맥락이 같다. 이명박 후보가 ‘노무현의 그림자’와 맞서 싸우는 형국에서 이 후보는 ‘자충수’만 조심하면 되었다. 마침내 검찰의 BBK 수사 발표로 ‘나쁜 이명박’이 사라지면서 이명박 대 이명박의 싸움 또한 종결되어가고 있다.

이명박 후보는 여러 점에서 ‘안티 노무현’의 수혜자였을 뿐 아니라 ‘노무현 어게인’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경희대 영문과 이택광 교수가 이런 현상을 짚어냈다. 이 교수에 따르면, 2002년의 대중들은 노무현 후보에게서 정치 경제적인 새로운 비전을 찾아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이명박 후보의 높은 지지율은 그에 대한 배신감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노 대통령이 이루어주지 못한 걸 보상받고자 하는 대중 열망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이명박 후보 캠프는 광고와 선거 캠페인 등에서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상당 부분 벤치마킹했다.

ⓒ시사IN 안희태12월4일 광주를 찾은 신당 정동영 후보(왼쪽)가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BBK에 묻혀버린 정동영 후보의 정체성

12월6일 대선 후보의 첫 번째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 정동영 후보는 이날 모두 발언부터 시작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심한 듯 이명박 후보를 몰아세웠다. 자신의 장점인 대북 정책에 대한 발언 시간마저 BBK 공세에 할애했다. 텔레비전 연설 때도 정 후보는 연설 앞 대목을 BBK 의혹 제기로 채웠다.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대위 대변인실은 매일 30여 개의 논평과 브리핑을 쏟아낸다. 12월 초까지 그 대부분이 BBK 의혹을 다룬 것이었다. 정책 관련 이슈는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다.

BBK 사건은 정동영 후보 측에서 볼 때 한동안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는 최대 무기였다. 하지만 이젠 “BBK에 매달리면서 자기 색깔을 잃어버렸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호남 출신으로 노 대통령의 측근인 한 초선 의원은 “정 후보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이유를 노대통령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지금도 여론조사를 보면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정 후보 지지율보다 훨씬 높다. 정 후보 지지율이 답보한 이유는 당의 정체성이 모호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경선 때 손학규 캠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정동영 후보는 자기 정치를 보여주지도 못했고, 이명박 대립각을 세우는 데도 실패했다. 결국 ‘정동영 필패론’을 극복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한향란11월28일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운데)가 명동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대선과 총선이 한 묶음으로 치러진다

2008년 4월17일 제18대 총선이 치러진다. 대선이 끝난 직후 한 차례 더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대선 직후 치러지는 총선은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대선이 끝나면 흔히 수개월 동안 대통령과 국민의 ‘밀월’ 관계가 지속된다. 이때 치러지는 선거는 상식선에서 판단할 때 여당에게 유리하다. 의원들은 당 울타리 안에 머물며, 당의 공천을 얻는 게 낫다. 실제로 이명박 후보와 격렬한 대립각을 세우며 저항하던 박근혜 전 대표 측 의원 대부분이 막판에 주저앉고 이명박 선거 운동에 동참했다.

반면 여권은 선거 승리의 가능성이 엷어질수록 총선이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백낙청 교수와 함세웅 신부 등 재야 원로들이 후보 단일화를 위해 적극 나섰지만 ‘말발’은 번번이 먹혀들지 않았다. 정동영 후보의 연립 정부 제안에도 문국현 후보의 완주 의사는 꺾이지 않았다. 창조한국당 고원 전략기획본부장은 “충정에는 공감하지만, 공학적 단일화에는 반대다”라고 말했다. 그는 “(창조한국당은) 대선 이후 현재보다 몇 배 큰 인재풀과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총선을 겨냥했다.

막판으로 치달을수록 총선과 대선이 한 묶음이 되어가고 있다. 한나라당이 55% 득표 전략을 가동한 것도, 대세에 지장이 없는데도 이회창 죽이기에 집중하는 것도 총선 전략의 일환이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을 10% 이하로 묶으면 ‘이회창 당’의 창당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그래야 ‘보수 내전’ 상황을 총선까지 끌고 가지 않으면서 정국 흐름을 이명박 페이스로 끌고 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안희태민노당 권영길 후보(가운데)는 12월5일 ‘부패청산 촛불문화제’에 참석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이 끝까지 단일화에 집중하는 이유도 총선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대통합민주신당 관계자는 “지더라도 30% 득표까지는 올려놔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수도권 참패는 물론 여권 자체가 궤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신당 내부를 감싸고 있다. 이 관계자는 “정 후보의 지지율을 30% 선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문국현·이인제 후보와의 단일화 외에는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대선 직후 총선이 치러진 사례는 1988년에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1988년 4월 초까지 총선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개헌으로 국회 임기가 3년으로 단축되어 대선 직후 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킨 집권 민정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공천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일을 최대한 늦추었다. 덕분에 단일화에 실패하고 대선마저 패하면서 국민의 공적이 되다시피 했던 양김(김대중·김영삼)은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1988년 4월 총선은 여소야대 정국을 낳으면서 끝났다.

대선이 끝나도 BBK 공방은 총선 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BBK의 실체는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채 정치 논리 속에서 실종되어버린 상태다. 위장 전입 등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 논란 또한 대세론 속에 묻혀버렸다. ‘이명박 후보의 해명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이명박 후보를 찍겠다’는 게 현재의 민심이다. 민심을 되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여권의 총선 승패가 달려 있다. 하지만 20년 전과 달리 현재 여권에는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도 민심의 응원도 없다. 손호철·강준만 교수 등이 최근 잇달아 제기한 ‘여권의 궤멸과 근본적인 반성론’은 그런 점에서 대선 이후에 새로운 논쟁거리로 떠오를 듯하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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