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고은 시인의 〈만인보〉 가운데 단 한 편의 시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1권에 수록된 〈머슴 대길이〉를 들련다. 시인이 유년 시절 고향 마을에서 만난 상머슴 대길이 아저씨를 생각하는 회인시(懷人詩) 형식으로 쓰인 이 시의 강렬한 매력은,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가를 회상하는 시적 형식에 있을 터이다.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3연) 이 진술에서 보듯이, 머슴 대길이 아저씨는 고은 시인에게 일종의 ‘최초의 기억’을 강력히 환기하는 의식·무의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세계문학 사상 유례가 없는 이 〈만인보〉의 의미란 내 안의 ‘머슴 대길이적인 것’의 가치를 찾으려는 구도 여행이고, 우리 안의 ‘머슴 대길이들’의 참다운 사람됨을 개체의 생명성으로부터 귀납하려고 한 시적 형식이라 보고 싶다. 시인이 〈만인보〉 연작을 시작하면서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서시〉, 1권)라고 언명한 대목은 그 좋은 방증 자료가 될 터이다. 

ⓒ뉴시스시인 고은(가운데)은 30년 만에 연작시집 〈만인보〉를 완결했다.
그렇듯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진리란 너와 나 사이의 관계에 있으며, ‘남하고 사는 세상’(〈머슴 대길이〉, 1권)을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했던 ‘무명씨’들의 삶과 정신을 껴안으려는 화엄적 사유를 특유의 직관 언어로 분출한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사유와 발성법은 이른바 근대적 서구시의 문법과는 차원을 완전히 달리한다. 김형수 시인이 ‘동참된 존재’라고 옳게 규정하듯이, 고은 시인은 어떤 종류의 체계와 질서를 세우려는 방식이 아니라, 그러한 체계 내지는 질서를 모두 지우고 돌파하려는 ‘직관’의 소유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고은 시인의 시를 ‘샤먼’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만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