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은 뒤늦게 당도했다. 사오정과 오륙도, 그리고 삼팔선을 지나서 왔다. 이태백이라는 한가한 이름보다 더 날이 서 있어서일까. 가장 늦게 왔으나 가장 확실하게 한국 사회의 화두 노릇을 하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은 2007년 8월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통해 왔다.

이름을 늦게 얻었을 뿐, 그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청년 실업’이라는, 뭉툭하고 암울하기 그지없는 용어를 통해 지칭되던 20대의 열악한 존재 조건은, 날이 선 용어 덕분에 비로소 조명을 받게 되었다. 작명자인 공저자 우석훈과 박권일은, 대한민국에 대해 ‘젊은 세대에게 인사나 시키는 나라’라고 일갈했고, ‘배틀 로열 세대’ ‘막장 세대’ 등의 무시무시한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택했다.

88만원 세대는, 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전체 근로자 대비 20대 임금 비율인 74%를 곱해 얻어진 수치이다. 이 용어는 단순히 실업난에 시달리는 20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폭발력의 계기는, 이 세대의 조건이 다른 세대에 비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역설한 데 있다. 세대 간 불균형, 나아가 세대 착취의 혐의를 제기한 것이다. 구조적 피해자가 있다면, 구조적 가해자 혹은 수혜자 그룹이 있다. 그들은 바로 자기 힘으로 한국 사회를 건설하고 변화시켰다고 자부해온 기성 세대, 즉 유신 세대와 386 세대이다.

대다수 조직에서 의사 결정을 하는 세대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유신 세대와 386 세대에게, 요즘의 20대는 잘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저 별종 취급하며 혀를 쯧쯧 차거나, 막연히 안쓰러워하기는 했으나 왜 그들이 학점에 일희일비하고, 토플에 목을 매는지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사오정과 오륙도, 삼팔선이라는 용어는 재빠르게 등장해 널리 유포되었다. 기성 세대는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일컫는 신조어조차 신속하게 만들어냈다. 언론은 이를 앞다퉈 증폭시켰다. 이태백이라는 말이 뒤늦게 등장하긴 했으나 사회에 편입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20대의 처지는, 그렇게 상당 기간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2007년 6월 현대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의 실업률은 7.6%로 전체 실업률 3.6%의 두 배를 넘었다. 구직 단념자나 아르바이트, 취업 준비생을 포함할 경우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은 19%를 넘어선다고 한다.

ⓒ뉴시스비정규직 싸움의 가장 첨예한 전선을 드러내고 있는 홈에버 노동자들.

번듯한 일자리에서 20대가 희귀종이 되어갈 즈음, 이 날선 용어가 유포되기 시작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기성 세대의 ‘일부’는 몹시 찔려 했다. 각종 공부 모임과 세미나 등에서 앞다퉈 이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사회과학 서적과 담을 쌓은 것으로 일컬어지던 20대도 움직였다. 〈88만원 세대〉는 8월 출간된 후 12월 초까지 2만5000부가 팔려나갔다. 출판사 레디앙 측에 따르면, 20대 구매율이 40%에 이른다. 평균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20대 도서 구매율이 곱절이 된 셈이다. 20대가 얼마나 저자들의 분석과 주장에 공명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덕에 기성 세대도 탈정치화된 20대를 이해하는 계기를 얻었다.

한국 사회가 그들의 열악한 처지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그들의 앞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딜레마는 더욱 깊어질 것이어서이다. 자신들의 이해를 반영시키는 정치 행위, 즉 선거에서 이들은 갈수록 불리해진다. 미국은 40대 이상 기성 세대가 투표권의 80%를 행사하는 형편이다. 한국도 머지않아 그런 비율에 근접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침체를 근심하는 범 세대 간 연대의 틀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구조적 가해자들의 각성은 가능할까? 최근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측은 ‘88만원 세대 수천명이 지지를 선언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한국 사회의 화약고, 비정규직

이 문제와 쌍을 이루면서도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 키워드가 있다. 비정규직이다. 올해 비정규직 문제는, 구호가 아니라 각 사업장에서 구체적 싸움의 형태로 분출되면서 이것이 한국 사회의 ‘화약고’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코스콤 비정규직들의 정규직 전환 투쟁, 그리고 이랜드 계열사인 홈에버 직원들의 싸움이 그것이다. 이들은 현재 비정규직 싸움의 가장 첨예한 전선을 드러내고 있다. 싸움을 시작한 지 600일이 넘도록 싸우고 있고, 많은 세력이 연대했으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의 싸움도 주목해야 할 사건으로 꼽혔다.

이랜드는 할인점 까르푸를 인수해 홈에버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 분란에 휩싸였다. 매장을 전격 점거하는 등 격렬한 싸움 탓에 이목을 끈 이랜드 직원들의 싸움은 비정규직 고용 실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분노한 홈에버 직원들은, ‘개업기념 특가세일. 비정규직 특가 단돈 80만원.’ ‘홈에버 하나 더 지으면 300명 더 비정규직’ 등의 생생한 구호를 내걸고 기업들의 비정규직 채용 관행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비정규직 싸움이 터져나오면서, 잠재된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가 자신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기회도 마련되고 있다. 생생한 노동 교육의 사례인 것이다.

아직 유력한 대선 후보의 발상은, 성장률을 높이면 일자리도 늘어난다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차기 정권에서 이 문제는 타협 없는 대결을 통해, 바닥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기 시작한 88만원 세대와, 스스로의 힘으로 비정규직 싸움을 이끌고 있는 코스콤과 이랜드 계열사인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회 분야 올해의 인물이다.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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