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4년 간 전국에서 사라져 간 ‘10평 미만 서점’의 개수이다. 동네 곳곳에 들어서있던 서점들이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의 영향으로 문을 닫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고 강한 서점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은 동네 서점들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도전을 펼치고 있다. 동네 서점을 꾸리는 이들은 ‘동네 서점만이 지니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을 건다.

글 싣는 순서

1.살아남은 동네 서점의 슬픔
2. 참고서 상점’으로 바뀐 동네서점
3. 아직 희망이 있다
4. 그곳에 가면 책향기가 난다

동네 서점은 누가 망하게 만들었을까. 대부분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의 영향을 꼽는다. 도서 정가제의 허술한 시행과, 성인 10명 중 3명은 1년 동안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을 정도(문화체육관광부, 2009 국민독서실태조사)의 빈약한 독서 문화도 언급된다. 

하지만 동네 서점 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언제까지 외부 영향 탓만 하고 있을 순 없다는 것이다. 충북 충주에서 ‘책이 있는 글터’라는 서점을 꾸리는 이연호 대표는 “동네 서점인들도 잘못한 게 많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동네 서점을 외면할 때, 그들에게 “왜 여기로 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한 번도 주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참고서처럼 당장 이득이 되는 책을 팔기에 급급하고 서점 주인이 정작 책을 하나도 읽지 않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핑계로 스스로 서점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윤성근 제공‘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는 모습. 동네 서점은 ‘책 판매’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자성은 새로운 시도로 이어졌다. 지난해 11월 한국서점조합연합회는 ‘서점의 독서운동’이라는 주제로 중소형 서점인들이 모여 앞날을 고민하는 포럼을 열었다. “작은 서점이 주도해 전국에 독서운동을 벌여보자”라는, 벼랑 끝에 몰린 동네 서점의 상황에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도 있는’ 제안에 공감대가 모아졌다. 1월부터는 전국 중형 서점 30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책방 나들이’라는 서평 전문지를 한 달에 한 번씩 내기 시작했다. 서점 주인과 직원이 좋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지역 독자들에게 대형 서점이나 언론이 제공하는 추천 책 목록 대신 ‘동네 서점이 추천하는 책’ 목록을 주자는 취지였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작은 변화들을 시도해 본 동네 서점인들은 “분명 동네 서점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있다”라고 확신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동네 서점은 자신들처럼 ‘작은 것’들을 지키고 전파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많은 동네 서점들에는 얇은 독립 잡지들과 지역 시민·사회단체 소식지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동네 서점이 사라지면 이런 곳들이 배포될 공간도 사라지는 것이다.

또, 작은 동네 서점에는 문화 행사를 하려고 유명 저자를 초청해도 잘 오지 않는데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역할을 찾을 수도 있다. 서울 혜화동 ‘책방이음’에서 일하는 조진석씨는 “세상에는 대형 서점 저자 사인회에 초청되진 않지만 충분히 좋은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동네 서점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 독자들과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각자의 철학에 따라 책을 진열하고 파는 동네 서점이 많다. 대형·인터넷 서점만 남는다면 그런 다양성이 사라지기 쉽다. 위는 부산 인디고서원 모습.
동네 서점의 또 다른 가치는 ‘지역성’이다. 동네 구석구석의 각기 다른 문화와 밀착할 수 있다는 점은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이 절대 따라하지 못할 장점이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대학로에 위치한 ‘책방이음’은 연극·희곡 책을 많이 갖다놓고 손님들에게 동네에서 벌어지는 공연 정보나 할인 티켓을 제공해준다. 서울 응암동의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는 지역 시민단체·방과후 공부방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문화제 같은 각종 행사를 벌인다. 강원 춘천의 ‘광장서적’은 춘천시 공무원 가운데 시 쓰고 소설 쓰는 사람들에게 단행본을 전시할 공간을 주기도 했다.

또 하나 동네 서점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지식의 지도’를 그려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책장에 꽂은 책 배치로 나타난다. 비교적 잘 알려진 동네 서점인 서울 명륜동의 ‘풀무질’, 통인동의 ‘길담서원’, 부산 남천동의 ‘인디고서원’은 일반 서점처럼 모든 책을 다 팔지도 않고 책을 진열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잘 팔리거나 대형 출판사에서 돈을 들여 홍보하는 책 대신 서점을 꾸리는 사람이 읽고 자신 있게 손님들에게 추천하는 책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놓여있다.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몇몇 대형·인터넷 서점만 남는다면 이런 ‘지식의 지도’ 역시 몇 가지로 통일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꾸리는 윤성근씨(35)는 “책방에서 책만 팔면 그건 책이 아니라 책처럼 생긴 물건을 파는 것과 같다. 책을 파는 책방이라면 책 안에 있는 가치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책 안의 가치를 나누는 방법을 고민하는 동네 서점이 아직 많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모두 좌절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증거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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