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12명이나 되는 대통령 후보 중 일부는 아예 흥정을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모두 알고 있듯이, 흥정의 목표는 내년 4월의 국회의원 총선거다. 높은 값에 ‘광(光)’을 팔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패를 들고 버티는 모습이 애처롭다. 하긴 정치란 원래 사회 내부의 수많은 세력이 눈앞의 이익을 좇아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것. 그 이상 무엇을 정치에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란 원래 눈앞 이익 좇아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것
이런 경우 헌법학자의 오랜 습관은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바꾸어보는 것이다. 솔직히 지난번 대통령 선거 이후 나는 ‘차라리 내각 책임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몽상에 빠지는 적이 많다.
1987년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아니라 내각 책임제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리하여 먼저 유혹에 굴복한 YS가 1990년 벽두에 TK 및 JP와 손잡고 내각 불신임 및 연정 수립을 선언했다고 해보자. 세 불리를 절감한 DJ는 국회 해산 대신 정계 은퇴와 외유를 선택하고, 이후 호남 포위 전략에 기초해 1992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지킨 YS 주도의 집권연합은 삐걱거리면서도 유지되었을 공산이 높다.
문제는 DJ의 복수전인 1996년 총선. 지역 구도에 당한 DJ는 동일한 논리로 앙갚음을 했을 것이다. 집권연합에서 JP를 빼내어 DJP 연대를 결성한 뒤, 영남 포위 전략을 구사하는 것 말이다. 철저하게 권력분점에 기초한 DJP 연대는 수도권의 시민사회 세력의 비판적 지지를 업고 YS+TK 연합에 신승을 거두었겠지만, 이념 배경이 전혀 다른 까닭에 사사건건 파열음을 낳았을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새로 결성된 보수 야당이 2000년 총선에서 정권을 되찾은 다음부터 내각 책임제 몽상은 그저 그런 얘기가 되고 만다. 동부 벨트와 서부 벨트에 기초한 두 세력이 내부적으로 불안한 동거에 시달리면서도 4년마다 정권을 주고받는 시나리오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몽상은 지난 20년 한국 정치사를 거의 그대로 복기하게 하지만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다섯 번의 대통령 선거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혹시 우리는 이처럼 덜 번거로울 수 있는 스토리를 대통령 선거라는 초대형 이벤트에 취해 더 번거롭고 더 창피하게 쓰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