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의 〈더러운 철학〉을 읽었다. ‘더러운’이라는 형용사와 순금의 에스프리를 연상시키는 ‘철학’이라는 명사가 결합된다는 것이 퍽 낯설다. 그러나 개그에서도 남발되는 이 세계의 본질로서의 더러움을 오늘의 인간들은 나날의 일상에서 거듭 체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러움을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다.

그러나 철학이 아닌 문학 관점에서 보자면, 더러움이야말로 진정성의 개념과 함께 중심적인 사유 대상이기도 했다. 가령 소설사회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루시앵 골드만의 논의가 그렇다. 더럽게 타락한 세계에서 인간이 자기 진정성을 증명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가 ‘더러운’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런 시대에는 오직 부조리한 방법으로 자기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인물이야말로 예외적 인물(주인공)의 전형적 특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철학자 자신이 철학과 철학하기에 깃든 더러움의 근거를 묻고, 그것을 확장해 지식인들의 담론과 오늘의 현실 전체에 대한 ‘우충좌돌’의 분석과 실천을 권유하는 글을 읽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좌충우돌이 아니고 우충좌돌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그의 주장은 좌와 우의 진영화된 담론의 착종된 논리를 내부로부터 해체(탈구축)한다. 그는 더러움의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완벽하게 스스로를 분리시킨 후 구경꾼 특유의 위선과 위악의 제스처를 취하는 지식인의 세련된 지적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소외’ 대신 ‘소내’ 개념을 제시한 까닭

ⓒ개마고원 제공
김진석(위)은 구경꾼 특유의 위선과 위악의 제스처를 취하는 지식인을 비판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김진석의 철학하기는 그에게 일관된 것이기도 한다. 그가 우리 지성계에 제출한 일련의 개념들은 이런 생각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가령 초월 개념 대신에 더러움의 조건과 몸을 섞으면서 넘어선다는 ‘포월’ 개념을 제시하고, 모순된 것의 기계적 종합이 아닌 ‘기우뚱한 균형’ 개념을 제시하고, 소외 개념 대신에 ‘소내’ 개념을 제시한 것이 그렇다. 이 개념들은 모두 더러운 현실의 복잡성을 그것과 몸을 섞으면서 지양하고자 했던, 치열한 철학적 고투의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 한국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처럼 김진석에게 절실한 질문은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야말로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견 철학의 대중화 혹은 시장적 르네상스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지적 상황에서 치밀하게 분석되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철학하기는 죽어가는데, 역설적으로 서구철학의 개념 수입은 번다하게 경쟁적이다. 가령 라캉, 들뢰즈, 지젝, 바디유, 랑시에르와 같은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글을 쓰는 비평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쓰이는 글들이 정작 오늘의 한국적 더러움에 대해서는 뾰족한 시각을 제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더러운 지적 풍토 때문인지 〈더러운 철학〉을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기자명 이명원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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