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흰 백합이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법원 들머리에 피었다. 8일 오후 1시, 흰 백합을 든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날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수수 의혹 공판이 처음으로 열렸다.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 등 한 전 총리 지지자들은 모두 결백을 주장하는 의미로 백합 한송이씩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진실을알리는시민(진알시) 등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은 김용철 변호사가 최근에 펴낸 ‘삼성을 생각한다’를 패러디한 ‘삼성을 조케 생각한다’는 피켓을 들고 ‘떡검’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은 “어제 새벽 3시에 잠들었다. 내가 잠을 설칠 정도인데 한 전 총리는 오죽하시겠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한 전 총리는 꼭 지키겠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안희태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 등 한명숙 전 총리 지지자들은 결백을 의미하는 백합을 들고 한 전 총리와 동행했다.
오후 1시42분, 서울지법에 도착한 한 전 총리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걸고 법정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라고 말하고 곧바로 재판정으로 올라갔다. 이날 재판정에서는 검찰과 변호인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먼저 한 전 총리는 A4 네 쪽 분량 모두 발언을 통해 “5만 달러 뇌물을 받지 않았다”라고 검찰의 공소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민주화 운동 이후) 두 번째로 재판정에 선다”라고 입을 뗀 한 전 총리는 “이번 사건은 민주계, 여성계의 상징적인 인물에 대한 악의적 날조다. 처음에 곽영욱씨의 진술을 듣고 경악했으나 검찰에서 그를 만났을 때, 곽씨가 검찰의 포로가 되었음을 알았다. 한명숙 표적수사에 모진 고초를 겪은 걸 보니 인간적으로 동정심이 일었다”라고 말했다.  백승헌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뇌물은 주로 은밀한 곳에서 주고받는데,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은 총리 공관에서 줬다고 한다. 의전이 엄격한 총리공관실에서 5만 달러를 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라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에 검찰은 표적 수사라는 주장부터 맞받아쳤다. 검찰은 “곽 전 사장의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막내 검사에게 사건을 배당했는데 우연히 한 전 총리에 대한 진술이 나왔다. 표적수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날 사건을 지휘한 권오성 서울지검 특수2부장이 직접 재판정에 나왔다. 검찰은 또 “한 전 총리가 수십 차례 출국했는데 달러를 구입한 흔적이 전혀 없고, 곽 전 사장에게서 받은 돈을 여행경비 등으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라며 한 전 총리쪽에 여행 경비 입증 자료를 요청했다. 변호인단은 “입증은 검찰 몫”이라며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시사IN 안희태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성을 조케 생각한다'라는 '떡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변호인단은 곽영욱 전 사장의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를 덮어주는 대신 한 전 총리의 허위 진술을 유도한 이른바 빅딜 의혹과 관련해 내사기록과 검찰 조사과정을 담은 영상물 등의 열람 및 등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검찰은 내사 기록은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반대했다. 이날 곽영욱 전 사장은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쪽 팔에는 링거액을 꽂고 휠체어를 탄 채 별 말없이 양쪽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재판부는 오는 11일 곽 전 사장 심문, 22일 총리공관 현장 검증, 26일 정세균 민주당 대표 증인 심문, 29일 한 전 총리 심문 등 일주일에 세 번씩 공판을 진행하는 집중심리를 거친 뒤 4월9일 선고를 하기로 했다. 한 전 총리 쪽이 재판부에 빠른 심리를 요청했고, 재판부 역시 “선거와 관련된 사건은 되도록 빨리 끝내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집중심리를 열기로 했다. 4월9일 1심 선고가 내려진 뒤 나흘 뒤인 4월13일~14일이 서울시장 후보 등록기간이다. 사실상 후보등록을 코앞에 두고 이뤄지는 1심 선고 결과가 한 전 총리의 서울시장 출마나 당선가도에 주요한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2시간 가량 진행된 재판이 끝나고 한 전 총리는 재판정에서 내려와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가장 먼저 다가온 한 전 총리의 남편 박성준 교수(성공회대)는 악수를 건네며 “수고했다”라고 했다. 재판을 마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 전 총리는 “모두발언 때 다 말했다”라고만 한 뒤 자리를 떴다.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김상희 의원은 “검찰은 곽씨 진술 말고는 새로운 내용을 아무것도 말 못했다. 이번 재판을 통해서 한 전 총리의 결백이 더욱 확실해졌다”라고 말했다. 열띤 취재 경쟁으로 지지자와 카메라 기자 간에 충돌이 일기도 했다.  한편, 한 전 총리는 지난 5일 주소지를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마포구로 옮기고 서울시장 출마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한 전 총리 캠프 쪽 관계자는 “지금으로서는 재판이 가장 중요하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아니라고 주장해야하는 상황이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4월까지는 일단 재판에 집중하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노무현 재단 사무실에서 검찰에 출석하는 한명숙 전 총리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삶과 양심을 돈과 바꿀 만큼 세상을 허투루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난해도 항상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한때나마 제가 가졌던 지위를 자랑하거나 허세를 부려 본 바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보도된 후 저는 국민을 향해서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저에게 단순한 언어적 수사가 아닙니다. 저의 살아온 삶 전체를 건 절규였습니다. 저에게는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화려한 경력보다는 저를 지탱해 온 삶의 진실이 더욱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검찰의 공소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5만 불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의 눈을 피해 슬쩍 돈을 받아 챙기는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할 줄도 모릅니다. 또 남의 돈을 스스럼없이 용돈처럼 받아쓰는 문화에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국가 공공시설인 총리공관에서 벌어진 오찬 자리에서, 비서관과 경호관들이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그런 자리에서 돈을 받는다는 것은 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006년 12월 20일 총리공관 오찬은 정세균 산자부 장관의 사의표명 후 지인들끼리 가진 송년회 성격의 조촐한 점심식사 자리였습니다.   12월 12일 국무회의 후, 정세균 장관은 총리집무실을 방문하여 장관직을 사임하고 당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상의하였습니다. 이후 대통령과 의논하여 후임 장관까지 내정되어 있었습니다. 12월 20일 오찬 시에 정 장관은 내부적으로는 이미 퇴임을 확정한 상태였고, 12월 29일 공식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퇴임하는 장관에게 총리가 인사 청탁을 한다는 일이 상식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정세균 장관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오찬자리를 마련했다는 검찰의 사건구성 설정 자체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저는 국무총리 임기 중에 국회의원 신분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활동하는데 돈이 필요했다면 후원회를 통해 모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리 재직 중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아예 후원회 계좌를 폐쇄하기까지 했습니다. 특별히 총리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따로 돈을 모아서 쓸 만한 필요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제 인생을 통해,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지위로 인해 원하든 원치 않든 민주주의를 이룩한 사람들에게, 여성계에게,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도덕성을 잃으면 이것은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저를 바라보고 온 사람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저는 그 책임감과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소명감을 매순간 자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여성총리로서 제가 일을 잘하고 깨끗해야만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자라나는 우리 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국무총리는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모든 공무원을 통할하고 지휘하는 자리입니다. 총리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공무원의 기강도 무너지고, 따라서 나라의 질서도 어지러워집니다. 저는 이런 막중한 책임감과 중압감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해 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총리공관에서의 5만 불 뇌물 수수라는 혐의는 너무나도 부당하고 악의적인 날조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는 그동안 검찰 소환에 불응했고 수사 과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렇게 떳떳하면 검찰 조사에 적극 응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묵비권은 피의자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부당한 검찰 수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수사는 조사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론플레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익명의 가면을 쓴 누군가에 의해서,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지어는 수사가 종결되기도 전에 제 혐의 내용이 샅샅이 구체적으로 때로는 내용을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언론에 유출되었습니다. 일부 언론의 보도 속에서 저는 이미 범죄자가 되어 있었고 저의 인격과 명예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검찰조사는 진실을 밝히는 공정한 절차가 아니라 요식절차에 불과했습니다.   저의 권리를 전혀 보장하지 않는, 피의사실을 조금씩 흘림으로써 저에 대한 언론의 매도를 이끌어냈던 부당한 수사에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뇌물수수’라니 이 무슨 해괴한 날조입니까? 이것은 저 한명숙의 살아온 삶 전체를 난도질하는 음해입니다. 참담한 심정에 가슴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저는 국정의 중심에서 장관과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에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에 응하였고 다만 부당한 수사에는 여전히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피의자로서 당연한 권리인 묵비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저는 이제 법정에 섰습니다. 법 절차의 정당성과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하며, 본 법정에서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성실히 재판에 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가 곽영욱씨를 알게 된 것은 2000년, 그가 당시 어려웠던 여성계를 선뜻 도와주었던 일이 인연이 되어서입니다. 그 뒤로 그저 기업을 잘 운영하는 기업인 정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알고 지냈을 뿐, 어떤 청탁을 서로 간에 할 정도로 허물없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그가 저에게 5만 불의 뇌물을 주었다는 진술을 했다는 사실에 처음엔 너무도 경악했고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가 검사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병약하고 공포에 내몰려 있었습니다. “살려 주세요 검사님, 저 죽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애원하는 처절한 모습을 봤습니다. 한명숙 표적수사에 얼마나 모진 고초를 당했으며 얼마나 재산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면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진술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인간적으로는 안타깝고 동정이 갔습니다. 이러한 궁박한 상황에서 그의 약점을 잡아 받아낸 진술 하나 만을 가지고 저를 몰아붙이고 있는 검찰의 수사는 재판과정을 통하여 그 허구가 명명백백히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는 지금 이 순간, 살아온 모든 인생을 걸고 제가 평생을 지켜온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죄의 유무를 따지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살아 온 삶 전체를 심판받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제가 가진 재산이라곤 지금까지 살아 온 삶 밖에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 저 역시 살아 온 삶이 소중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직 진실만을, 양심의 소리만을 말하겠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일은 난감하고 가슴 답답한 일입니다만,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재판에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정의와 공평의 눈으로 진실을 밝혀내실 판사님의 혜안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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