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4일 오후 2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광주 유세 현장.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하이 톤 목소리가 광장 구석구석 퍼졌다. 광주공원을 메운 1만여 인파가 ‘정동영’ ‘강금실’을 번갈아 연호했다. 광주에서 올해 처음으로 대형 유세 판이 벌어진 날, 경선 때 정동영 캠프에서 조직본부장을 지냈던 정진우 특보는 “이제 선거가 시작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자후를 토하고 연단에서 내려온 임종석 의원은 팬이라는 한 여성의 ‘안아주세요’ 공세에 쑥스럽게 웃었다.
정동영 후보가 단상에 오르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만들기’의 일등 공신이었고, 광주 서구가 지역구인 염동연 의원은 좌중을 둘러보며 “전보다는 못하지만 단일화만 된다면 80%는 무난하다. 쉽지는 않지만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라고 말했다.
염 의원의 바람대로 또 한번 바람이 불어줄까.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유세가 벌어졌던 5년 전에 비하면 모여든 시민의 숫자가 절반을 조금 넘었다. 김대중 후보가 유세하던 1997년에는 유세장 분위기가 어떠했느냐고 묻자 한 시민이 말했다. “말도 마소. 그땐 여기보다 훨씬 넓은 광주역 광장이 사람들로 꽉 찼지라.”
유세 직후 대통합민주신당 광주시지부를 방문하기 위해서 택시를 탔다. 신우교통 소속 택시기사 김 아무개씨가 공원 주변에 세워져 있는 버스 행렬을 보면서 말했다. “공원에 무슨 일이 있었는갑죠?” 그는 정동영 후보의 광주 방문 소식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요? 올해는 대통령 선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이날 낮에 택시를 세 번 탔는데 정 후보의 광주 유세 소식을 아는 기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
광주시 서구 치평동에 있는 대통합민주신당 광주시지부를 방문했다. 사무실 주변이 주황색 셔츠 차림으로 웃고 있는 정동영 후보의 얼굴 포스터로 온통 도배되어 있어서 그나마 선거 열기가 느껴졌다. 정경준 사무처장은 과거 새정치국민회의 시절부터 두 번의 대통령 선거와 서울시장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두루 치러본 전문가다. 그에게 소감을 묻자 “이번처럼 무력하게 느껴지는 선거는 처음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이기겠다는 의지도 열정도 없다”라는 말로 광주 민심을 전했다. “과거에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단어가 호소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먹고사는 것 외에는 관심을 끌지 못한다.”
대선 직후에 총선이 치러지는 점도 선거 열기를 식히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승리 가능성이 적은 대선에 ‘올인’하기보다 지역에 머무르며 내년 총선에 대비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지역이 복수로 선대위원장을 두고 있어서, 의원들은 잠재적 총선 경쟁자 혼자서 지역에 머무르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공천권이 없는 지도부가 의원들의 ‘징발’을 강제할 방법도 별로 없다. 한 실무자는 “우리 당은 지도력이 해체되어버린 정당 같다”라고 말했다.
“이번처럼 무력한 선거는 처음”
광주가 변했다. 광주는 한때 남도 정치 1번지로 불렸다. 사실상 한국 정치 1번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색하다. 대선을 채 보름도 남겨놓지 않았는데 시내 어느 곳에서도 선거 열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안호순씨(47, 서구 쌍촌동)는 “한나라당은 꺼림칙하지만 이명박 후보는 괜찮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나라당 지지율과 이명박 후보 지지율이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여론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대통합민주신당 관계자는 “지역 기업인들이 이명박 후보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이 지역은 건설 경기가 경제지표를 끌어가다시피 하는데,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 건설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점도 이전과는 달라진 풍경이다. 개인택시 기사 김 아무개씨는 “DJ와 노무현을 계속 대통령으로 만들어줬지만 광주가 혜택 본 게 뭐가 있느냐”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한나라당 광주 선대위 류태환 특보단장은 “전남도청이 광주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근처인) 무안으로 옮아간 이후 광주 인구가 5만명 줄었다. 최근에는 광주공항의 국제선 기능마저 무안공항으로 옮겨갈 계획이어서 이곳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라고 전했다.
광주가 변했다는 점은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이곳 인사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11월 초 김주훈 전 조선대 총장이 한나라당에 입당해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신일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문일섭 전 국방부 차관 등 호남 출신 예비역 장성 서른두 명도 이명박 지지를 선언했다. 최근에는 개인택시 기사 50명과 이 지역 지식인 747명이 한나라당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 중에는 김채구 전 광주시의회 부의장을 포함해 여권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 있는 한나라당 광주시지부 당사. 1980년대 민정당 시절부터 당사로 쓰였던 이곳은 한때 대학생들의 화염병 시위 목표물이 되곤 했다. 지금도 건물 앞에 전경 버스가 서 있지만,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만난 이만의 광주시지부 선대위원장은 “광주는 현재 정치적 진공 상태다”라고 말했다. 한때 뜨거운 정치의 거점이었던 이곳이 어느덧 찍을 후보를 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현상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이만의 위원장은 DJ 정부 시절부터 현 정부 초반까지 환경부 차관을 지냈다. 그가 책상 위에서 입당 원서 한 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발적으로 입당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입당 원서 100장을 중앙당으로 보냈다. 10월14일 광주 선대위가 출범한 이래 당원 수가 40% 정도 늘었다.”
“한나라당 당원 두 달 만에 40% 늘어”
한나라당은 이명박 지지세가 젊은 층에서 확산되는 점에 더욱 고무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세대가 젊을수록 지역 정서가 옅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류태환 특보단장은 “2002년에는 대학생 투표율이 35%였는데 이번에는 50%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호남에서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아진다는 점은 이명박 후보에게 좋은 소식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호남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8~9% 정도 나온다. 한나라당 광주 선대위 관계자들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출마한 직후부터 이회창 변수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보다 정동영 후보의 지지 표가 더 많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류태환 특보단장은 말했다. “이 지역에서는 대개 강경 보수 성향의 친여 인사들이 이회창 지지로 넘어갔다. 어차피 이들은 권력 지향적 이들이다. BBK 수사 결과 발표 이후 될 사람한테로 쏠릴 것이다.”
지금까지 몇 차례 대선에서 호남은 김대중-노무현 후보에게 90% 가까운 몰표를 선사했다. 하지만 올해 대선에서는 그런 몰표 재현이 불가능하리라는 점에 이 지역 여야 정치권 모두 동의한다. 12월5일 오전 11시. 한나라당 광주시지부 사무실에서 한나라당 당직자들과 함께 검찰의 수사발표 현장 중계를 지켜봤다. 서울중앙지검 김홍일 3차장 검사의 발표가 끝난 직후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게임 끝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