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자살론’을 몇 권 지니고 있으나 하나도 읽지 않았다. 자살은 내 독서 주제가 아니다. 예외적으로 자살 관련서를 읽은 이유는 단지 장 아메리의 책이어서다. 서경식 선생의 글을 통해 알게 된 20세기를 대표하는 양심적 지식인 두 사람 가운데 작가 프리모 레비에 대한 궁금증은 〈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로 얼마간 풀 수 있었다. 에세이스트 장 아메리와의 첫 만남에서 책의 주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장 아메리의 글을 읽는다는 게 우선이었다.

1912년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장 아메리는 본래 이름이 한스 차임 마이어다. “반유대주의가 있기에 유대인인 내가 태어났다”라고 말한 그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무관심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유대인으로 낙인찍힌 아메리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반나치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게슈타포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여러 강제수용소로 끌려다니며 심한 고초를 겪는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아메리는 험난한 인생을 홀로 견디다 1978년 10월17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무겁고 심각한 주제인 ‘자유죽음(Freitod)’의 젖줄은 독일 철학자 니체다. “죽음이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서 벌어진 경우에만 자유롭지 못한 죽음이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56쪽에서 재인용) 아메리에게 “자유죽음은 바로 ‘에셰크’에 대한 대답으로서, ‘에셰크’를 담고 있는 인생을 겨눈 저항으로서 있다”. 자신의 모어(母語)를 매우 사랑한 아메리였지만, 독일어에는 독특한 음가를 대체할 낱말이 없어서 프랑스어 단어 ‘에셰크’의 번역을 포기한다. 나는 ‘좌절하다, 실패하다’를 뜻하는 ‘echec’를 ‘막다른 골목’으로 받아들인다.

빤한 자살 연구와 선을 긋고 출발한 아메리의 ‘자살론’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인간이 정면으로 응시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뤄서 그런 건 아니다. 자극적인 충격요법 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수용소에서 직업이 뭐냐는 독일군의 물음에 ‘독일문학자’라고 답했다가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았다는, 표지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 글의 사연이 충격적이다. 나는 아메리가 보여준 사유의 깊이와 심오함에 놀랐다. 그렇다고 난해한 구석은 없다. 속독을 허락하지 않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과 자살 얘기로 일관하는 데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그간 내가 ‘자살론’ 읽기를 꺼렸던 것은 겁이 나서다. 마음 편히 읽히는 아메리의 처절한 ‘증언’은 어찌 된 영문인가? 무슨 조홧 속인가?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대한 응전”

장 아메리(위)는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멀리하고 자살을 존중한다.

아메리는 또한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멀리한다. 자살과 죽음을 논하며 에둘러가거나 얼버무리지도 않는다. 그는 자살을 존중한다. 그에게 추악한 잘못을 저지른 자의 오래된 변명(‘뭐 다 살려고 하는 일이죠’)은 일고의 가치만 있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라며 꾸짖는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에는 결연히 ‘아니요’라고 말한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지금껏 무시되어온 자살의 명예회복을 꾀한다.

“이제 자살은 가난이나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욕이 아니다. 자살은 더 이상 침울해진 정서를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니다(중세에는 심지어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대한 일종의 응전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에 내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서문’에서 장 아메리는 이 책이 자유죽음 옹호론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나 역시 섣부르게 자유죽음을 편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산 거지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속담은 비루하다. ‘생명은 최고의 자산이 아니다.’ 그리고 해를 똑바로 쳐다볼 순 없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기자명 최성일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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