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에 사진 한 장이 있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 ‘턱슨 시티즌’을 찍은 사진이다. 신문은 구겨지고 더럽혀져 파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빨간색 재활용 상자에 담겨 있다. 구겨진 신문 1면에 달린 머리기사 제목이 특이하다. ‘우리의 묘비명.’ 1870년 10월에 창간한 이 신문은 2009년 5월16일을 마지막으로 폐간했다. 재활용 상자에 담긴 신문은 이날 발행된 마지막 신문이었다.

콜로라도 주에서 발행되는 유서 깊은 신문으로, 여러 차례 퓰리처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로키 마운틴 뉴스’ 2009년 2월27일자의 1면 기사도 사망 신고였다. 150년 역사를 접고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하며 ‘콜로라도여, 안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미국과 세계의 신문에 지난해는 가장 춥고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 한 해 동안 미국의 일간 및 주간 신문 142개가 폐간하거나 발행을 중지했다. 규모와 지역에 관계없이 고르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잉크 냄새 풍기는 종이 신문의 시대는 끝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이 신문의 위기를 걱정하는 이유는, 건강한 민주 사회를 지탱해야 할 주요한 축이 흔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뉴스와 정보는 인터넷을 비롯한 대안 매체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신문의 기능을 모두 대신할 수는 없다. 증시표만 읽으며 세상을 살 수가 있겠는가. 제대로 된 신문 저널리즘의 가치와 중요성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 

경향신문은 ‘삼성 관련 칼럼 기고’를 거부한 데 대한 ‘반성문’(위)을 2월24일자 1면에 게재했다.

지난해 미국 일간·주간지 142개 폐간·정간

신문을 비롯한 인쇄 매체의 위기를 마차와 자동차에 비유하는 주장이 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마차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마차가 사라진다고 걱정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여기서 마차는 신문이고 자동차는 각종 온라인 매체를 비롯한 첨단 매체다. 그러나 새로 나온 자동차가 빠르기는 해도, 내가 가야 할 곳을 가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마차는 느리더라도 판자촌·빈민촌 구석구석을 누볐는데, 그보다 훨씬 빠른 자동차는 도무지 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판자촌을 잊어버린다. 그래도 괜찮은 것인가.

2007년에 삼성의 비리를 공개 고발해서 큰 화제를 일으켰던 김용철 변호사가 최근 펴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는 삼성보다 한국 신문을 먼저 생각하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종이 신문이 이 책의 광고를 거부하거나 굳이 사양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거대 광고주의 눈치를 보아가며 내린 결정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고 불리는 신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문만 읽고 방송만 보는 사람이라면, 이런 책이 세상에 나왔는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이 ‘삼성을 생각’해볼 이유는 없을 터이다. 

경향신문은 광고를 싣지 않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이야기를 쓴 외부 필자의 글을 싣지 않아서 파란을 겪었다. 일선 기자들과 독자들의 항의 끝에, 경영이 어렵더라도 대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언론이 할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내놓았다.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솔직하게 사정을 고백하고 반성을 한 덕분에 독자들로부터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신문의 위기는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다. 이를 경제 상황, 독자들의 뉴스 이용 행태 변화, 인터넷 등 대안 매체의 등장 같은 외부 요인과 경영 미숙, 신뢰도 상실, 과당 경쟁 같은 신문 시장 내부 요인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신문 쪽에서 보면 외부 요인은 상수다. 개개의 신문사가 몸부림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대신 내부 요인, 특히 한국 언론의 고질인 신뢰도 문제는 위기를 타개해나가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경향신문의 진지한 반성문이 나가고 나서, 신문을 구독하겠다는 사람이 여럿 등장했다. ‘신뢰 자본’은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기자명 허광준 (위스콘신 대학 신문방송학 박사과정)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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