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중앙대 문과대학 겸임교수.문화 평론가)예술 작품이 한국에 들어오면 색다른 기능을 갖는다. 비자금 조성 또는 증여세 포탈 기능. 최근 삼성과 관련한 그림 한 점이 이처럼 독특한 담론을 이끌어내며 예술 작품의 존재론까지 새롭게 정립하는 형국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과 더불어 아메리칸 팝 아트를 지탱해온 또 하나의 기둥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광고나 만화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이는 팝아트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하다.

최근 그의 작품 한 점이 사회적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제목은 ‘행복한 눈물’. 다른 나라에서라면 아마 이 그림을 놓고 대중의 이미지 취향 따위의 얘기가 오갈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역시 엽기적이다. 이 작품을 놓고 벌어지는 담론 역시 매우 독특하다. 우리 사회가 이 작품에 던지는 비평적(?) 물음은, ‘작품아, 너는 도대체 어디에 걸려 있느뇨’이다.

이 물음에 이제까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제기됐다. 첫째, 이건희 회장 집, 둘째, 서미 미술관.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이 결정적 의미를 갖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술 작품에는 전시, 감상, 연구, 투자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예술 작품은 다른 나라에 없는 또 다른 기능을 갖는다. 바로 비자금 조성 기능 혹은 증여세 포탈 기능이다.

이 사회의 특수성은 이 작품과 관련해 또 하나의 생산적(?) 담론을 낳았다. 민주노동당의 시위대는 그 작품 사진 옆에 삼성에서 해고당해 우는 여인들의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행복한 눈물’ 대 ‘불행한 눈물’. 듣자 하니 ‘행복한 눈물’은 가격이 무려 100억원, ‘불행한 눈물’은 월 130만 원. 작품 하나가 100명이 10년 동안 받을 임금을 잡아먹은 셈이다.

난나 그림
삼성을 르네상스의 메디치 가문과 연결하는 담론도 나왔다. 한 칼럼니스트는 삼성이 메디치 가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디치 가문은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도록 피렌체 거리에서 절대로 말을 타지 않았으며, 철저한 누진세 원리에 따라 누구보다 많은 세금을 냈으며, 그 많은 명작 컬렉션을 고스란히 도시에 헌납했다는 것.

삼성이 세운 미술관의 이름이 떠오른다. 박물관의 어원은 무제이온(museion), 즉 ‘뮤즈의 전당’이다. 따라서 ‘리움’이라 함은 ‘이씨의 전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 미술관이 사회의 것이 아니라, 이씨 가문의 것임을 아예 이름에 박아놓은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라한 몰골과 리움의 호화로운 자태

삼성과 관련한 또 하나의 예술사회학. 리움에 수장된 한국의 고미술품은 거의 국보급. 컬렉션이 차라리 국립중앙박물관보다 낫다. 또 리움을 짓는 데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10배에 해당하는 건축비가 들었다. 서울 외곽에 틀어박힌 국립미술관의 초라한 몰골과, 세계적 건축가 3인이 서울 중심에 지은 리움의 호화로운 자태. 삼성에 휘둘리는 이 사회의 초상이다.

웹 아티스트 팀 ‘장영혜 중공업’이 생각난다. 이들은 삼성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웹 아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삼성이 소유한 로댕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하자, 냉큼 그 품속으로 귀순해버렸다. 웹 아트조차 웹 바깥 전시장으로 끌어내는 그 힘의 정체는 뭘까? 이렇게 삼성은 이 나라에서 예술사회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뿐인가? 세간의 추측이 맞는다면, 삼성은 예술 작품의 존재론을 새로이 정립한 것이다. 비자금으로서의 작품. 그 어느 나라에서 비자금을 액자에 담아 미술관에 걸어놓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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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진중권 (중앙대 문과대학 겸임교수·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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