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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티아 센은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을 비판한다. 위는 1910년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통제’하는 영국 관리.

입맛에 딱 맞는다기보다 무난하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책조차 만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먼저 집어든 책을 ‘엎어버리지’ 않았다면, 이 책은 안 읽었으리라. 적어도 ‘삑사리’가 나기 시작한 3분의 2 지점부터 나머지 3분의 1은 그냥 내버려뒀을 거다. 물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저자의 문명 충돌론 비판은 통렬하고 명쾌하다. 〈문명의 공존〉에서 하랄트 뮐러의 다소 소심해 보이는 뜨뜻미지근한 반론에 견주어 더욱 그렇다.

이 책은 ‘정체성 갈등과 결합해 조장된 폭력’을 매개로 극단적인 환원에 따른 ‘인간의 축소화가 가져오는 끔찍한 영향을 검토’한다. ‘원인 귀속’(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인식할 때 그 사건의 원인이라고 돌리는 것)이 이루어질 경우 두 가지 왜곡을 구체화할 수 있는데, 정체성을 잘못 기술하는 것과 단일 정체성이라는 환영(幻影)이 그것이다. 정체성을 무시하고 소속 관계가 단일하다는 가정은 ‘호전적인 왜곡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에 시큰둥했던 나는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지금도 여전히 공동체(주의)를 기피하는 것은 지나친 귀속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 것 같다. 냉전이 실질적으로 벌어진 장소가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주장은 신선하다(이 점은 좀처럼 인정되지 않는다). 초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양성한 아프리카의 군 지도자들은 냉전 이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분란의 불씨가 된다.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 맞아?

이 책만 봐서는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라는 저자의 이름값은 무색하다. 58쪽에 나열한 그의 다양한 정체성과는 별개로 아마르티아 센은 그저 세계화를 편들고 시장경제를 받드는 주류 경제학자다. 그가 옹호하는 세계화의 실체는 불명료하다. “나는 세계화가 전반적으로 새롭지도, 반드시 서구적이지도 않고, 저주 역시 아님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가 말하는 세계화란 내가 질색하는 자본의 세계화 또한 아닌 듯싶다. 이도저도 아니면 다음과 같은 단언은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세계화는 제국주의보다 훨씬 대규모이며, 엄청나게 더 위대하다.” 혹시 과대망상!

그가 숭배하는 시장경제 역시 모호하다. 그는 ‘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도식은 꺼린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 제도 없이 지내려 한다면, 경제 발전의 전망이 철저히 손상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라는 속내마저 숨기지는 않는다. ‘경제 발전’도 그렇지만 저작권법 개정(실제로는 개악), ‘제도적 장치’ ‘적절한 제도 변경’ ‘훈련과 교육을 위한 시설의 개발’ 따위 주장과 표현은 미심쩍고 상투적이며 식상하다. 테러리즘을 돈 많은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술책쯤으로 여기는 옅은 인식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무기’가 바로 테러리즘이라는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인도 벵골 출신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마르티아 센은 오랜 세월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꽤 비판적이다.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아일랜드와 인도의 대기근을 수수방관한 영국의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19세기 초반 인도로 파견되는 영국 고위 관리의 필독서를 쓴 저자가 인도에 가보기는커녕 인도 말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코미디다.

최근 영국에서 일고 있다는 대영제국을 그리워하는 분위기에는 넌지시 불편한 기색을 보이나, 종교학교 지원정책을 강화한 영국 정부의 결정은 크게 우려한다. 이런 그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은 학습자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교사이기도 했다”라고 뭘 모르는 소리를 불쑥 내뱉으며 우리의 자존심을 긁는다. 아무래도 앞서 한 말을 잊었나보다. “자기 자신을, 또는 자신의 조상들을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이 왜곡한, 또는 나쁘게 취급한 누군가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런 동일시가 아무리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온당치 않다.”

기자명 최성일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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