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04년 불법 대선 자금 제공 혐의로 검찰에 출두한 이학수 당시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사진 가운데). 오른쪽 뒤에 당시 김용철 법무팀장이 보인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에 뛰어들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진영에서 2002년 대선 잔금 이야기를 꺼냈다. 삼성 비자금 특검 문제가 불거지자 이명박 후보 측은 당선 축하금을 거론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압박했다. BBK 사건으로 지지층이 이탈하자 이명박 후보 측은 다시 이회창 후보 대선 자금을 공격하겠다고 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삼성은 명동 사채 시장에서 200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전 삼성증권 최 아무개씨 등을 통해 국민주택채권 837억원어치를 사들였다. 2002년 대선에서 정치권에 뿌릴 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삼성은 이 중 324억7000만원을 이회창 후보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를 통해 한나라당 측에 전달했다. 노무현 후보 측에는 이광재·안희정 씨를 통해 총 21억원을 건넸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측에도 15억4000만원을 전해 모두 361억1000만원이 정치권으로 갔다고 검찰은 발표했다.

검찰은 나머지 443억3000만원은 삼성 측이 채권 원본을 보관하고 있으며, 32억6000만원은 퇴직 임원 격려금 등에 썼다는 삼성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돈이 모두 이건희 회장 개인의 재산이라고 하자, 검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삼성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는 2002년 대선 자금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김인주 씨만이 정확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만 대선자금 수사 당시 그룹 법무팀장으로 검찰을 상대했고, 뒤처리를 담당했기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그릴 수는 있다고 했다. 그의 증언을 통해 2002년 삼성의 대선 자금 실체에 접근해본다. 김 변호사는 민감한 부분에서는 특검에서 말하겠다며 에둘러 피해갔다. 다음은 그의 얘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삼성의 대선 자금은 어디로?:삼성은 대선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2002년 당시 월요일과 금요일에 열리는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 팀장 회의에서 대선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대선 레이스가 막바지일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론조사 결과가 책상에 올라왔다.

대세론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에 삼성의 대선 자금은 이회창 후보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2002년 법무팀장이 되면서 삼성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구조조정위원회에 들어갔는데 분위기 전체가 이회창 후보 쪽이었다. 다른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삼성의 최고위층은 모두 한나라당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 한나라당에서 당길 수 있을 때 당기자며 돈 달라고 너무 자주 찾아와서 이학수·김인주 씨가 피하기도 했다. 서정우 변호사가 회사 앞에 찾아오자 이학수 실장이 이건희 회장 집으로 도망간 일이 기억에 남는다.

대선 자금에서 큰 부분은 이학수씨와 김인주씨가 직접 처리했다. 특히 김인주씨의 역할이 컸다. 김인주 사장은 가족끼리 에버랜드에 놀러 갔다가 길이 막히면 헬기를 띄울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이회창 후보에게는 김인주 사장이 서정우 변호사를 통해 줬다. 대선 후보 라인은 여러 개가 아니다. 예전에는 홍석현·이종기 등 중앙일보 사장이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창구였다.

대선 자금은 이건희 회장 개인 돈인가?:대선 자금 사건 당시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과 소병해 전 삼성화재 고문 등, 삼성 전·현직 임원이 개인 자금으로 후원금을 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돈은 분명히 그룹의 비자금이다. 검찰도 계좌 추적을 통해 이 돈이 삼성의 비자금이라는 사실을 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3억원을 정치자금으로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찰이 이건희 개인 돈이라고 발표한 대선 자금도 비자금이 맞다. 구조본 간부들은 회사 공금도 모두 이건희 회장 개인 돈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대선 자금을 이건희 개인 돈이라고 말하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거짓된 진술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을 지을 때 전낙원씨 집을 샀고, 이때 이건희 회장의 수표 하나가 나와 애를 먹었다. 이후 이 회장은 자신의 지분을 늘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개인 돈을 쓴 적이 없다. 좋은 일에도 절대로 안 쓴다. 재단에 출연하고 기부하는 돈도 모두 그룹 비자금이다.

대선 자금 수사 당시 삼성의 대응은?:대선 자금 수사 때 이학수·김인주 씨는 나를 통해 수사에 응하겠노라고 대검 중수부장에게 전했다. 안대희 중수부장을 만나서 수사 순서를 첫 번째만 안 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순서를 뒤로 미루었다. 그 사이 김인주 사장은 두 달간 국내에서 잠적했고,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실장은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런데도 수사는 삼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003년 말과 2004년 초에 도피 중인 김인주 사장을 만나서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실장을 모시는 처지에서 수사에 응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더니 나를 배신자 취급했다. 수사 과정에서 이학수 실장과 김인주 사장은 정치권에 건넨 대선 자금 액수가 40억원이라고 했다. 당시 삼성은 40억원을 제공한 것으로 하고 수사를 끝내자며 검찰과 협의했다.

당시 대선 자금 수사는 기업의 협조에 의존하는 수사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룹의 비자금 수사로 방향이 바뀌면 삼성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안대희 중수부장은 내가 겪은 가장 청렴하고 능력 있고 강직한 검사인데, 대선 자금이 삼성의 비자금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덮었다. 대검 중수부는 지금껏 삼성 비자금이 나오면 알아서 덮었다. 삼성이 대검 중수부장 관리에 목을 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합뉴스노무현 대통령과 송광수 전 검찰총장(왼쪽). 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둘 다 친삼성 인사로 꼽힌다.

대선 자금 수사가 제대로 된다면 삼성 대선 자금 액수는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현금에 대해서는 수사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행방이 묘연한 삼성 채권의 행방을 검찰은 알았을 것이다. 당시 채권 일부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대검에서 쥐고 있다고 삼성에서는 파악했다.

검찰 출두 전날인 2004년 3월4일 밤 12시30분께 이학수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실장은 “김인주가 너한테 가르쳐준 것을 싫어할 것이다마는 사실은 300개(300억원)다. 미안하다. 내일 검찰 출두하는데 같이 가달라”고 말했다. 이 또한 삼성의 실제 대선 자금 액수와는 차이가 크다. 이학수 실장은 “삼성은 증거가 확실히 나올 때까지는 무조건 부인하는 빛나는 전통이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대선 자금 수사 전략은?:삼성은 대선 자금 수사를 예의 주시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은 삼성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송 총장은 동갑내기 정연주 삼성 엔지니어링 사장과 친했다. 송 총장은 바둑을 아주 좋아했다. 정연주 사장은 바둑이 1급이었는데 어지간한 고단자들보다 강했다. 골프도 수준급이었다. 정 사장은 바둑을 두면서 한두 점씩 져주거나, 골프에서 꼭 한 타를 져주는 식으로 상대를 관리했다. 정연주 사장은 섭외(삼성에서는 관리를 ‘섭외’라고 한다)를 통해 자리를 지키는 인물로 그룹에서 유명했다.

명동 채권 시장을 샅샅이 뒤져 삼성 채권을 찾아낸 남기춘 검사가 송광수 총장실에 찾아가 이학수 실장을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남기춘 검사의 의견은 묵살되었다(대선 자금 수사 당시 송 총장은 ‘송짱’이라고 칭송하는 팬클럽이 생겨났다. 송 총장의 형인 송광욱씨는 삼성전기 전무로 재직 중이다. 송 전 총장은 지난 4월 숭실대 강연에서 노 대통령의 불법 대선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2 혹은 3 정도 된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학수 실장이 조사를 받는 곳에 함께 갔는데 중수부 수사관과 파견 형사들이 조사실을 기웃거리며 실시간으로 조사 상황을 삼성 측에 보고했다. 위에서 아래까지 검찰이 삼성에 매수된 것을 확인했다.

이회창 후보에게 대선 잔금이 있는가?:액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삼성에서 받은 돈 가운데 상당한 액수가 남아서 이회창 후보가 그 돈을 집으로 가져간 것으로 삼성에서는 파악했다. 이후에 대선 자금 수사가 시작되자 삼성 측에 되돌려줬다고 한다. 돈을 받은 사람이 돈을 그냥 돌려주었을 리는 만무하다. 다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다만 모종의 협의가 있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성에서 준 돈이 문제가 되었다고 돈을 전부 돌려받은 일은 없었다. 당시 삼성과 이회창 후보가 불러주는 대로 검찰 수사가 정리되었다. 삼성이 현금으로 준 대선 자금은 아예 수사하지도 않았다. 이 부분에 수사가 필요하고, 수사하면 어렵지 않게 나올 것이다. 당시 대검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삼성에 돌려준 돈을 수사하는 데 노력이 부족했다. 이에 관해서는 특검이나 검찰 수사에 도울 부분이 있다.

노 대통령에게 당선 축하금이 갔는가?:노무현 대통령은 사석에서 이학수를 가장 존경하는 경제인으로 꼽았다. 이학수 실장은 노 대통령이 청문회 스타가 된 후부터 돈독한 관계였다고 말했다. 이학수 실장은 부산상고 후배 노무현의 당선을 바랐다. 그런데 당선 가능성이 낮아 돈을 줄 명분이 적었다. 정몽준과 막바지에 단일화를 해서 노 대통령에게는 그다지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영수증 처리하는 공식 정치 자금의 100%가 여당에 간다는 삼성의 공식도 지켜지지 않았다. 

노 후보 측에 돈을 주기는 했다. 이학수 실장은 “노무현 후보가 ‘안희정·이광재를 나라고 생각하고 주시오’라고 해서 돈을 줬다”라고 말했다. 대선 막판에 흐름이 바뀌어 노 후보가 굉장히 좋았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후 삼성과 사이가 더 좋아졌다. 노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가 LG에 입사한 것에 대해 삼성이 기분 나빠할 정도였다. 대선 자금을 제대로 못 줘서 당선 축하금이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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