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MBC 사장은 결국 자리 보존을 택했다. “끌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내 발로 걸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던 호언은 허언이 됐다.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며 그동안 엄 사장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던 많은 이와 시민사회 진영은 당분간 허탈한 심정을 달래야 할 것 같다. 엄기영의 ‘커밍아웃’이 MBC와 시민사회 진영에 남긴 상처는 크다.

12월10일 MBC 최대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이사장 김우룡) 임시 이사회 결과는 MB 정부의 ‘MBC 장악’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방문진은 이날 엄기영 사장이 ‘재신임을 물어달라’며 제출한 MBC 경영진 8명 전원의 사퇴서 중에서 4명의 사표는 반려하고, 4명의 사표는 수리했다. 엄 사장과 김종국 기획조정실장, 문장환 기술본부장, 한귀현 감사는 살아남았지만 김세영 부사장 겸 편성본부장, 이재갑 TV제작본부장, 송재종 보도본부장, 박성희 경영본부장은 교체됐다.

사표가 반려된 이와 수리된 이를 보면 방문진의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하다. 보도·제작·편성·경영이라는 핵심 분야 이사들은 이번에 모두 경질됐다. 이번 임원 교체는 향후 MBC의 보도·제작·편성 등에 큰 변화가 올 것임을 예고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과정에서 엄기영 사장이 보여준 행보다.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왜 엄 사장이 사퇴서를 냈는지 의혹을 제기한다. 초기에는 엄 사장이 본부장들만 내칠 수 없어 책임지는 차원에서 사표를 제출했다는 해석이 많았지만, 엄 사장이 유임 보장과 관련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사퇴서를 낸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른바 ‘김우룡·엄기영 사전 교감설’이다.

‘사표 파동’은 엄 사장의 국민에 대한 배신
 

‘엄기영·김우룡 사전 교감설’이 도는 가운데 결국 엄기영 사장(왼쪽 두 번째)은 “내 발로 걸어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던 호언을 허언으로 만들었다.


‘사전 교감설’은 방문진이 엄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대신 보도·제작·편성·경영 등 핵심 임원들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이번 사태를 마무리한다는 게 요지다. 사실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 사장의 강제 퇴진’에 반대하며 방문진의 MBC 경영진 압박을 비판해왔던 MBC 노조와 시민사회 진영 입장에서 ‘사전 교감설’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전 교감설’이 단순히 설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됐다. MBC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표 파동’은 MBC 구성원과 국민에 대한 엄 사장의 배신이자, 방문진과 MB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백기 투항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사실 임기가 남은 공영방송 사장의 강제 퇴진은 MB 정부와 방문진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선택이다. 방송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엄 사장을 강제 사퇴시킬 경우 국민적 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 여론전에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MB 정부와 방문진 처지에서 ‘최상의 카드’는 엄 사장을 유임시키면서 주요 이사 및 간부 교체를 통한 ‘MBC 길들이기’였다. 그것이 여론의 부담을 덜면서 MBC를 ‘친여 방송’으로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엄 사장이 세간의 의혹대로 백기 투항을 했다면 MB 정부로 하여금 여론의 저항을 피하면서 ‘MBC 길들이기’에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게 길을 터준 셈이다. 엄 사장 본인도 방문진의 결정을 전해 듣고 매우 당황했다고 하지만, 이 말을 믿는 내부 구성원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연임을 대가로 MBC의 정치적 독립을 훼손했다는 점에서 향후 엄기영 사장에 대한 평가는 예전과는 궤를 달리할 것이다”라는 게 시민사회 진영의 대략적인 분위기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향후 MBC가 어떻게 될 것인가로 모아진다. 방문진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더 커지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새롭게 선임될 이사진을 통해 보도와 제작 부문을 강하게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엄 사장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리라 보인다.

물론 이사진 선임 권한은 사장에게 있지만 핵심 이사 4명을 교체하는 대가로 ‘유임’을 얻은 엄 사장 처지에서는 방문진의 의중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12월15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선임될 새 이사진의 면면을 보면 ‘2기 엄기영호’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보도와 시사 프로그램에 대한 대대적 개편 역시 새 이사진 선임 이후 가시화될 전망이다. 이사들이 국장·부장에 대한 인사권을 가졌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 인적 쇄신을 통한 간부 교체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간부 교체 이후에는 프로그램 통폐합이나 ‘사전 검열’을 통한 방송 전반에 대한 압박도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MBC 안팎에서는 〈뉴스데스크〉는 물론 〈PD수첩〉과 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개편 대상 1순위’로 꼽는다.

 

 

김우룡 이사장(위)의 방문진은 MBC를 더 쉽게 길들일지 모른다.

MBC 노조 “엄기영 사장 인정 못한다”

MBC 노사관계가 긴장 관계를 넘어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MB 정부와 방문진의 압박에 노사가 큰 틀에서 ‘공동전선’을 구축해왔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MBC 노조·본부장 이근행)는 이미 “엄기영 사장을 인정할 수 없다”라며 ‘불신임’을 선언했고, 김우룡 이사장 퇴진 투쟁과 새 이사진에 대한 출근 거부 투쟁까지 밝힌 상태다.

문제는 MBC 노조의 투쟁 동력이 얼마나 가동될 수 있느냐다. MBC 노조는 김우룡 이사장 퇴진 투쟁을 진행하면서 엄기영 사장과도 대척점에 서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시민사회 진영의 MBC에 대한 시선이 달갑지 않은 것도 부담이다. 엄 사장이 정권의 ‘MBC 장악’ 의도에 정면으로 맞섰다면 ‘연대투쟁’에 나서겠지만, 스스로 사표를 던진 상황에서 MBC를 지켜줄 만한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YTN을 비롯해 KBS와 SBS까지 방송계가 대부분 ‘친여적’으로 재편된 상황이란 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MBC 노조의 투쟁이 그만큼 고립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MB특보 출신 김인규 사장 반대를 위한 KBS 노동조합의 총파업 투표 부결은 MBC 노조에게는 악재 중의 악재다. 지난 언론노조 총파업 당시 주축 세력 중의 하나였던 전국언론노조 SBS본부(SBS 노조)는 차기 위원장 선출을 두고 재공고를 낼 정도로 내부 기반이 약해졌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KBS·YTN에 이어 MBC까지 ‘친여 성향’으로 재편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MBC 노조가 처한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는 MBC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진영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다.

 

 

기자명 민임동기 (〈PD저널〉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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