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학 총학생회 선거가 끝났다. 아니 끝나지 못했다. 서울대·이화여대 등 무려 20여 개 대학에서 총학생회 선거가 파행으로 얼룩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투표율이 낮아서 무산된 것이 아니다. 투표 부정, 도청, 후보자격 박탈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투표가 무산되었다. 2009년 한국의 대학가는 심한 ‘선거 플루’를 앓고 있다. 

가장 극적인 곳은 서울대학교다. 6년 연속 투표기간 연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올해 불미스러운 일이 세 가지나 발생했다. 하나는 투표함이 사전에 개봉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과정에서 도청이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하나는 이런 일 때문에 두 번에 걸쳐서 총학생회 선거를 했는데도 결국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서울대 X파일’ 혹은 ‘학관 게이트’라 불리는 이번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부정은 서울대 담장을 넘어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졌다. ‘유튜브’에 투표함이 개표 전에 개봉된 적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동영상이 올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영상은 문제를 제기한 측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을 도청했기 때문이다. 

대전대학교에서는 학칙을 바꿔 총학생회장에 연임된 학생을 학교 측이 제적해 논란이 되었다. 위는 학생들이 학교 측을 상대로 항의 집회를 하는 모습.
문제투성이였다. 현 총학생회가 구성한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함을 부실하게 관리했다. 30여 개 투표함 중에서 10여 개가 미리 개봉된 것으로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이와 관련해 부정선거 의혹이 일어 공청회가 소집되었지만 선관위는 “조사위원회 활동이 편파적이다”라며 불참해버렸다. 선관위 책임자들이 잠적하면서 의혹은 끝내 풀리지 못했다. 

서울대 등 20여개 대학에서 선거파행

부정투표 의혹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없이 재투표가 이뤄졌다. 1차 선거에 참가했던 5개 팀 선거대책본부(선본) 중에서 2개 팀 선본이 불참했다. 3개 팀 선본이 재선거를 치렀지만 투표율 미달로 결국 선거가 무산되었다. 이번 선거에 참여했던 한 선본 관계자는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심층보도를 해야 할 만큼 부정과 비리가 만연한 선거였다. 내년 봄에 3차 선거가 치러지더라도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서울대의 경우 선관위를 구성한 기존 총학생회가 비운동권 계열이었고 문제제기를 하는 선본은 운동권 계열이었다. 반면 영남대에서는 운동권 계열 총학생회가 구성한 선관위 쪽에서 비운동권 계열 후보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운동권 후보가 단독으로 출마해 선거가 치러졌는데 찬성보다 반대표가 많아서 당선되지 못했다. 

용인대(위)에서는 총학생회 선거 기간 중 투표함 탈취 사건이 발생했다.
이화여대의 경우는 비운동권 계열 총학생회가 구성한 선관위에서 운동권 계열 후보의 후보 자격을 박탈해 문제가 되었다. 선관위가 경고 누적을 이유로 후보 자격을 박탈하자 이들은 삭발을 하면서까지 항의했다. 이에 아랑곳 않고 선관위가 선거를 강행하자 다른 후보까지 사퇴해 결국 비운동권 후보 단독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학생들이 선관위의 행태에 반발해 투표를 보이콧함으로써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산되었다.

대전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 당선자와 선관위 책임자가 제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올해 총학생회장이었던 오주영씨가 개정된 학생회칙에 따라 연임에 도전해 당선되었는데 학교 측이 "학교 명예를 실추시키고 학생을 선동했다"라며 그 과정을 문제 삼아 오씨와 학생회칙 개정 책임을 맡은 선관위 책임자를 제적하는 초유의 조치를 감행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울산대에서는 훼손된 투표함이 발견되어 재투표가 이뤄졌고 용인대에서는 투표함을 훔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 부경대에서는 대리투표와 뭉치표가 적발되었다. 부산대에서는 후보가 휴학 중인 사실이 드러나 선거가 무산되었고 동아대에서는 후보자의 성추행 사실이 알려져 사퇴했다. 성균관대에서는 양쪽 후보가 각각 성추행 의혹과 경고 누적으로 후보 자격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렵게 선거가 마무리된 대학도 극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고려대학교의 경우 민주당 전병헌 의원의 딸인 전지원씨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는데 “민주당 국회의원의 딸이 당선되면 고려대가 민주당의 시녀가 될 것이다”라는 흑색선전이 퍼지기도 했다. 많은 대학에서 후보들 간 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총학생회 선거가 치러졌다. 

ⓒ시사IN 고재열이화여대 총학 선거에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한 정윤지(왼쪽)·신유진(오른쪽) 씨는 삭발로 항의했다.
그러면 대학 총학생회 선거가 왜 이렇게 과열 혼탁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일까? 그것은 총학생회가 중요한 이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로부터 받는 학생회비와 학교 측에게서 받는 교비 그리고 기업이 주는 협찬금 규모가 상당하다. 총학생회 간부 출신 한 대학생은 “한번 이권에 맛을 들이면 기득권을 계속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총학생회 선거 부정이 생겨난다”라고 말했다.  

서울 소재 대학 총학생회 회계 담당자이던 한 대학생이 밝히는 총학생회 비자금 조성 방식은 이렇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봄 축제, 가을 체육제 계약을 모두 수의계약으로 체결하면서 리베이트를 받는다. 세금계산서를 끊더라도 10% 정도를 업체에 보전해주고 이중계약으로 차액을 챙긴다. 리베이트를 충분히 주지 않으면 행사가 끝난 뒤 트집을 잡아서 위약금을 현금으로 받아낸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상금을 줄 때 영수증 사인을 연필로 받아 지우고 조작한다. 이렇게 하면 학교 측도 대충 눈을 감아준다고 한다. 유사시 총학생회를 견제할 때 쓸 수 있는 카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련한 비자금으로 조직원을 관리하고 다음 총학생회 선거를 대비한다. 선거 1~2개월 전 다음 총학생회 선거에 나올 간부가 USB 저장장치 무료 배부나 다이어리 나눠주기 사업을 진행하며 얼굴을 알린다. 일종의 사전선거운동을 하는 셈이다. 선거가 임박하면 총학생회 간부를 전부 해촉해서 선본에서 뛰게 한다. 선거자금이 부족하면 거래 업체들로부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축제 계약을 주겠다고 하고 미리 받아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세가 약하면 때로 세력 연합을 만드는데 이때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총학생회 이권을 나누는 것이다. 사업권 중 일부를 넘겨주고 단일후보를 내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 나타나는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양상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운동권도 비운동권 선본 못지않게 학내 복지 공약을 충실히 내고 있고 비운동권도 운동권 못지않게 사회 현안에 대해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선순환식 상호 작용보다 빨리 배우는 것이 있다. 바로 구태다. 운동권 출신 한 대학생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서로 못된 것만 배웠다. 운동권의 조직 이기주의와 비운동권의 상업주의가 결합해 총학생회 선거가 막걸리 선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기획사, 총학 지원하고 이권 따내

대학 총학생회 선거를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외부 세력에는 학교 당국과 기획사가 있다. 학교 당국은 반운동권 계열 후보에 대해 노골적인 지원을 하면서 운동권 계열 후보에 대해서는 각종 규정을 내세워 출마를 무산시키거나 후보 자격을 박탈시킨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학생회 선거와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선거에서 이런 학교 당국의 개입이 문제가 되었다. 일부 비리 사학의 경우 임시이사회 체제를 무너뜨리고 복귀하기 위해 미리 우호적인 총학생회 후보의 당선을 뒤에서 돕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획사는 총학생회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축제 사업권을 줄 총학생회를 미리 지원하는데 이들 기획사는 다른 이름의 회사를 여러 개 만들어 다른 회사 이름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부터 봄 축제와 겨울 체육제까지 모조리 유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출마자가 공약으로 내세우는 USB 저장장치를 지원해주기도 한다.

기획사들에게는 10주년 단위의 설립주기에 걸리는 대학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기업 협찬을 받아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규모가 크고 유명한 대학인 경우 협찬금의 단위가 커진다. 지난해  고려대의 경우 수천만원의 기업후원금을 총학생회 간부가 개인통장으로 관리하고 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총학생회 선거가 혼탁해지게 된 데는 학생들의 영향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한 총학생회 간부 출신 대학생은 “학생들이 용량이 더 큰 USB 저장장치를 주고, 축제에 연예인을 더 많이 데려오는 총학생회를 선호하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라고 항변했다. 올해 경희대학교 선거에서는 USB 저장장치보다 훨씬 비싼 외장하드를 제공하겠다는 후보가 등장하기도 했다.

‘집단 이기주의’에 갇혀 있는 운동권, 그리고 ‘캠퍼스 상업주의’에 함몰된 비운동권, 어느 쪽도 대안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촛불집회를 거친 대학생들이 ‘깨어 있는 학생의 조직된 힘’과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마다 총학생회 사업방식이나 선관위의 선거 운영방식에 대해 조목조목 문제제기를 하는 개인 자보를 자주 볼 수 있다. 명지대학교의 경우 여학생 3명이 ‘민들레’라는 모임을 만들어 봉인이 제대로 안 된 투표함이 있었는데도 투표가 강행된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압박해서 선관위가 문제제기를 받아들이게 하기도 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버려야 할 유산이 혼재하는 가운데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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