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과 공정을 핵심 가치로 삼는 국세청. 하지만 언제부턴가 국세청은 그 가치와 거리가 있다. 특히 국세청 수장들은 거리가 워낙 멀어서 긴 설명이 필요하다.

2007년 11월6일 전군표 국세청장이 현직 청장으로는 처음 구속됐다. 부산지방국세청장으로부터 ‘인사 청탁’ 명목으로 거액을 받은 혐의였다. 국세청장 구속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역대 청장 16명 중 7명이 구속되거나 사법처리를 당했다. 전 청장의 전임 이주성 국세청장은 20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뇌물로 받아 구속됐다.

2008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세무서장 초청 만찬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오른쪽)
문제는 후임 청장 선임이었다. 대선을 한 달가량 남긴 상황에서 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고심 끝에 노대통령은 한상률 국세청 차장을 국세청장에 임명한다.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한 관계자는 “한상률 신임 국세청장이 11월30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을 때부터 3개월짜리 청장이라는 말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국세청장 교체설이 대두됐다. MB 진영에서는 대선 직전 국세청이 MB와 친인척의 재산과 탈세 의혹을 사찰한 데 대한 앙금이 있었다. 여기에 이른바 MB 파일을 둘러싸고 친이계 갈등까지 번지면서 국세청장 처지가 곤혹스러웠다. 대통령의 최측근 정두언 의원은 “대선 직후 한 청장에게 국세청에서 만든 MB 파일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한 청장이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대선 직후인 2008년 1월 ‘신성해운 로비 의혹’이 불거지면서 한 청장 교체는 확실해 보였다. 한 청장이 2004년 조사4국장이던 시절 신성해운 측에게 5000만원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진술이 나왔다. 그러나 2008년 3월 한 청장은 이명박 정권의 초대 국세청장으로 유임된다. 6월 초 신성해운에서 1000만원을 받은 의혹으로 이광재 의원은 검찰에 소환됐다. 하지만 5000만원을 받았다는 한 청장은 소환조사 없이 수사가 마무리됐다. 이를 두고 당시 애경그룹 자회사와 관계가 있다고 지목된 임채진 검찰총장과의 빅딜설이 나돌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한 측근 인사는 “한 청장은 죽다 살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에 맞춘 정책을 국세청이 잘 만들었고, 정권에 충성하는 노력도 많이 했다”라고 말했다. 

2008년 7월 국세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기업인이 운영하던 태광실업과 정산개발 2곳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를 실시한다. 태광실업은 부산의 법인 기업 476곳 중 하나로 재계 620위권 규모의 신발 공장이다. 관할청인 부산청을 제쳐두고 국세청 내 정예 부서인 서울청 조사4국 요원 7~8명이 태광실업을 6개월간 샅샅이 훑었다. 한 국세청 관계자는 “조사4국에서 중소기업을 6개월간 조사한다는 것은 청장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3개월짜리 한상률 청장 ‘승승장구’

올해 1월 촛불 파동을 몸으로 막아 대통령의 신임이 높았던 어청수 경찰청장과 김성호 국정원장이 경질됐다. 하지만 가장 먼저 잘릴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한상률 국세청장은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돌발변수가 생겼다. 바로 ‘학동마을’ 그림 파동이다. 지난 1월12일 수뢰혐의로 구속된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 이미정씨가 해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했다. “2007년 초 1급 인사를 앞둔 시점에 남편과 함께 한상률 국세청 차장 내외와 모처에서 넷이 만났다. 당시 한 차장이 국세청 내에서 자기와 경쟁관계에 있는 A모 지방국세청장을 ‘자리에서 좀 밀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한상률 당시 국세청 차장 내외로부터 그림을 직접 받았다.” 한 청장은 강력 부인했다. 하지만 그림 파동은 사실로 확인됐고, 1월16일 한 청장은 청장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3월15일 미국으로 출국했지만 곧바로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한  ‘기획출국설’이 제기됐다.

구속된 안원구 전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
한 전 청장은 미국으로 떠났지만 다시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박연차 게이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이어진 박연차 수사는 ‘한상률의 국세청’에서 첫 단추가 끼워졌다. 3월25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작년 11월 초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 박연차 회장 소유의 태광실업·정산개발 등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민정수석실을 건너뛰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특히 박 회장이 빼돌린 수백억원 가운데 ‘괴자금’ 50억원의 실소유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일 가능성이 언급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청장과 청와대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음을 정권과 가까운 조선일보에서 확인한 것이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한 청장의 보고를 받고 ‘국세청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 국세청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칭찬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당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 라인에 있던 한 고위 검찰은 “국세청이 확보한 내용이 워낙 방대했다. 검찰은 박연차 회장 비서의 메모에 담긴 리스트 등을 확인하는 작업만 했다”라고 말했다.

국세청 세무조사 과정에서 박연차 회장의 로비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박 회장은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의형제 사이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에게 매달렸다. 천 회장은 박 전 회장의 부탁을 받은 뒤 곧바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을 만나 “박연차는 내 동생 같은 사람이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베이징 올림픽 때 천 회장은 박 전 회장으로부터 재차 부탁을 받고 일시 귀국해 한 전 청장에게 “세금은 얼마든지 낼 테니 검찰 고발만은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천 회장은 수십 차례나 한 전 청장에게 전화로 청탁했다고 한다. 천신일 회장과 한 전 청장은 서울과학종합대학원 CEO 과정 동문으로 서로 막역한 사이다.

MB 파일, 청장 연임 로비, 박연차 수사, 그림 파동…. 국세청과 관련한 의혹은 산더미인데 풀리는 의문은 없었다. 특히 세무조사 무마 의혹을 수사한다면 한 전 청장 수사는 필수였다. 하지만 검찰은 한사코 한 전 청장을 조사할 이유가 없다며 형식적인 이메일 조사로 끝냈다. 지난 6월 박연차 수사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홍만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은 “세무조사 관련해서는 충분하게 진술을 들었다. 한 전 청장이 귀국한다고 해도 불러서 더 조사할 건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런 검찰의 수사 태도는 의혹 확산을 막으려는 ‘꼬리 자르기’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 전 청장 “언제라도 필요할 때 귀국한다”

그런데 갑자기 안원구 국세청 국장(49)이 툭 튀어나왔다. 지난 11월18일 민주당 의원과 면담이 예정된 날 새벽, 안 국장이 전격 검찰에 체포된 것이다. 안 국장은 5개 기업으로 하여금 세무조사 무마를 대가로 부인의 갤러리에서 그림을 사도록 해 14억 6600만원의 이득을 본 혐의를 받았다. 그동안 안 국장은 청와대와 국세청의 강도 높은 사퇴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한편으로 국세청은 안 국장에게 산하단체 사장 자리를 제의했다. 안 국장의 부인 홍혜경씨는 “국세청과 관련된 여러 의혹을 정리해야 할 희생양으로 남편을 택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상률 전 국세청장
안원구 국장이 입을 열면서 그동안 국세청 주변을 맴돌던 의혹들이 하나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국세청이 MB 파일을 만들었다’ ‘도곡동 땅은 이명박 대통령 소유다’ ‘한 청장 이상득 의원에게 로비해 살아남았다’ ‘한상률 인사 대가로 3억원 요구했다’…. 안 국장의 이런 증언은 하나같이 이명박 정권의 도덕성을 흔들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의혹의 중심에 선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안씨 주장이 사실무근이다. 언제라도 필요할 때 귀국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이 바로 필요한 때다’라는 지적에 한 전 청장은 입을 닫고 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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