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인사인 이장춘 전 외무부 대사(왼쪽)의 폭로로 한나라당은 혼란에 빠졌다. 이동복 전 의원(가운데)과 조갑제씨(오른쪽)도 이명박 후보 공격에 나섰다.
11월22일 낮, 이장춘 전 외무부 대사가 이명박 후보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BBK 명함’을 공개한 사실이 알려진 직후 한나라당 대변인실 직원들은 혼돈에 빠졌다. 김경준씨 가족의 잇단 폭로에 대한 반박 논평을 발표하면서도 온화한 눈웃음을 거두지 않던 박형준 대변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박 대변인은 이날 낮 자기가 한 말을 몇 차례나 바꾸면서 허둥댔다.

이 전 대사는 이명박 후보에게 20년 지기였다. 2001년에는 한나라당 국제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대표적인 보수 논객으로 활동해왔다. 이 전 대사의 이런 이력이 한나라당 사람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절대 우군’으로 생각하던 보수 진영 내부에서 이 후보에게 비수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같은 날 오전에는 ‘이 후보의 재신임을 묻자’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가 한나라당 당원들에게 전송되면서 당이 발칵 뒤집혔다. 강재섭 대표가 “분열을 일으키고 내분을 조장하려는 세력이 있다. 수사 의뢰하겠다”면서 진화를 시도했지만, 오후까지 당사 주변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쑥덕거리는 당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루 뒤인 11월23일에는 후보 교체론이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동복 전 한나라당 의원(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이 ‘대선 후보를 박근혜 씨에게 양보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공개 편지를 이명박 후보에게 보낸 것. 이 전 의원은 편지에서 “온 나라가 불안 속에 빠져 있습니다. 소위 BBK 의혹은 이 후보에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이 후보를 놓아줄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라며 보수 진영의 위기감을 드러냈다.

이 전 의원은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는 동안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이 후보가 결자해지 차원에서 후보를 사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정당 후보’가 유고될 때 대체 후보의 ‘추가 등록’ 마감 날인 12월1일까지 남아 있는 9일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여유다”라면서 보수 진영이 이 후보 사퇴 운동에 나설 것을 은근히 촉구했다.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를 밀었던 김용갑 의원도 11월23일 ‘이 후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라’라는 제목의 개인 성명서를 내고,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대응 자세를 정면 비판했다.

일부 인사는 이회창 지지 쪽으로 선회 

BBK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한나라당 안팎의 이른바 ‘정통 보수’ 인사들 사이에서 ‘이명박 회의론’이 조심스럽게 퍼지고 있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와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등이 제기했던 이른바 ‘스페어 후보론’이 이명박 불안감에 불을 붙이는 형국이다.

조갑제씨는 이명박 흔들기의 논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친이명박 성향의 칼럼을 발표했지만, 이회창 후보 출마가 유력해진 뒤부터 이회창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극우 성향인 양영태 대령연합회 사무총장도 노골적으로 친이회창-반이명박 성향 칼럼을 발표하고 있다. 11월19일에는 이동복 전 의원, 조갑제씨, 이상돈 중앙대 교수, 전원책 변호사, 유석춘 연세대 교수 등이 모여 ‘대한민국의 내일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이명박-이회창 단일화를 촉구하기 위해 모였다고 밝혔지만,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이명박 후보의 실용주의 노선에 불만을 가진 극우 인사들이 사실상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기 위해 모였다”(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했던 인사들 사이에서 이명박 회의론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이중 일부는 후보 교체가 안 되면 한나라당을 떠나서 이회창 후보를 미는 방안까지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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