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데뷔를 준비하던 김서연양(18)은 얼마 전 눈물을 머금고 기획사를 나왔다. 함께 데뷔 준비를 하던 팀이 깨졌기 때문이다. 랩을 맡았던 멤버가 탈퇴했다. 이유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춤 연습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예쁜 다른 멤버는 구색 맞추기로 어느 팀이든 갈 수 있지만 보컬을 맡은 자신은 갈 자리가 없었다. 고민 끝에 기획사를 나왔다. 

자고 나면 새로운 걸그룹이 등장하지만 그 뒤안길에는 김양과 같은 사례가 즐비하다. 어설프게 데뷔했다가 반응이 없어 접은 팀, 데뷔 직전에 준비 미흡으로 접은 팀, 데뷔도 못하고 기다리는 팀…. 김양이 있었던 기획사에만도 20세 전후의 연습생 20명 정도가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양은 “가수가 다 된 것 같았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니 힘이 빠진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중학교 때 밴드부를 하면서 보컬에 재주를 보인 김양은 실용음악과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연습에 더 몰입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매일 정오부터 자정까지 노래 연습만 했다.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2년 반 동안이나 반복해온 일상이다. 기획사에 들어가면 좀더 체계적으로 연습할 수 있지만 자신을 옥죄는 계약이 하기 싫어 마음 맞는 사람들과 연습하는 길을 택했다.

아직도 계약사기 많아

걸그룹을 지도하는 김성은씨(왼쪽)와 걸그룹을 준비하는 김서연양.
김양과 같은 걸그룹 지망생들이 자주 걸리는 덫은 바로 전속계약이다. 싹수가 보이는 지망생을 구슬려 갈취나 마찬가지인 노예계약을 하는 악덕 기획사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한 대형기획사 스카우트 매니저는 “스카우트하고 싶어도 노예계약이나 나름없는 계약을 해둔 지망생이 많아 스카우트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여학생을 스카우트하려다 이전 소속사와 계약이 너무 불리하게 되어 있어서 돌려보낸 적이 있다. 계약서가 깨끗해지면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그녀를 스카우트할 수가 없었다. 벌써 20대 중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친한 선후배들과 걸그룹을 준비하던 임수진씨(24)는 최근 걸그룹의 꿈을 접었다. 데뷔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씨는 “주변 선후배들도 대부분 포기했다. 걸그룹 준비한다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아쉽다”라고 말했다. 

대학시절 흑인음악 동아리를 했던 김성은씨(29)는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하면서 계속 데뷔를 준비했다. 대학시절 함께 활동했던 후배들과 걸그룹을 준비했지만 막판에 멤버 한 명을 구하지 못해 데뷔 기회를 놓쳤다. 그때 데뷔했다면 그룹 쥬얼리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할 수 있었겠지만 끝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기회는 몇 번 더 왔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음반사가 갑자기 인수합병돼 무산되기도 하고, 개인 제작자와 함께 제작하다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좌절한 후 그는 걸그룹 연습생들의 노래 선생이 되었다. 몇몇 그룹의 준비를 도와주며 데뷔시키면서 대리만족도 얻었다. 최근엔 자신이 가르친 연습생 한 명이 결원이 생긴 걸그룹에 보충 멤버로 들어가기도 했다.

요즘도 많은 소녀가 걸그룹의 꿈을 좇아 김씨의 연습실을 찾는다. 그러다 좌절하는 소녀를 숱하게 지켜본 김씨는 “어린 나이에 안 겪어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는다.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도 견뎌야 한다. 데뷔한다고 해도 1~2집 성공해서는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도 없다. 지켜보기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