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 교육의 종말을 선언한 당사자는 예일 대학 법대 석좌교수 앤서니 T. 크론먼이다. 그는 대학에서 계약·파산·법률학 등을 강의하면서도, 유럽의 전통 인문학 커리큘럼과 정신에 충실한 ‘지도 연구 프로그램’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급격히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크론먼은 ‘학술 연구주의’의 극단적인 강화(교수 업적 평가)가 인문학 분야에까지 무제한적으로 관철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크론먼의 생각에 인문학은 전문화에 근거한 업적 지상주의와는 전혀 다른 내적 논리를 가진 학문 영역이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객관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는 학문적 이상을 내세우나, 인문학은 ‘삶의 전체적인 의미’를 탐문한다는 점에서 ‘과학’보다는 ‘종교’와 더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신’의 절대성에 굴복시키지 않은 채 끈질기게 세속적인 삶의 장소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태도를 크론먼은 ‘세속적 인문주의’로 명명한다.

세속적 인문주의자는 총체적인 삶의 의미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이기 때문에, 근대 대학이 요구하는 업적 지상주의와 분과 학문의 전문성(학문상의 노동 분업)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새로운 사실이나 정보의 집적과 의미화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한 인간에게 ‘삶의 본질적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오늘의 교육 현실이나 대학 구조 속에서 이런 질문은 ‘비학문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전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인문학자조차 삶의 의미에 대해 학생과 대화를 지속하기보다는 신분 보장과 관련된 업적 평가용 논문 쓰기에 골몰하니, 삶의 무상성에 절망한 사람은 중세와 같이 종교로 귀환하거나 과학기술의 환상적 유토피아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크론먼은 심원한 인생 공부를 대학의 인문학 강좌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는 대학 도서관.

학생에게 근원적·존재론적 질문을 던져라

대학의 인문학 강좌에 언젠가는 삶의 무상함에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될 학생에게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져 심원한 인생 공부를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크론먼의 지론이다. 인문학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다운 삶의 총체적 의미와 전망을 묻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노동 현장에서 끈질기게 탐문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노동이 유예된 대학 시절에 학생은 체계적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탐문하고 장기적인 인생 철학을 설계해야 한다.

예일 대학에 개설된 ‘지도 연구 프로그램’은 그런 의욕에서 출발한 체계적인 인문학 강좌다. 이 프로그램에는 사명감으로 충만한 인문학 교수 수십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강좌당 학생 수는 15명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학생들은 인문학 고전을 읽고 매주 에세이를 제출해야 한다. 엄격한 면접을 거쳐 해마다 학생 200명이 이 프로그램을 이수한다. 이 강좌의 특징은 성적 평가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데 성적이란 무의미한 것이니까.

기자명 이명원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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